(이글은 연합감리교뉴스가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와 협력하여 세계 각지에서 섬기고 있는 선교사들의 기도 제목과 소명을 포함해 팬데믹 이후 현지에서 감당하는 사역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선교사를 소개합니다> 시리즈다. 이번에는 세계선교부 본부에서 사역하는 김은하 선교사의 사역에 대해 소개한다.)
1. 선교사가 되기까지
한국 시골 교회의 목회자 자녀로 자란 나는, 선교사 전기를 읽으면서 막연하게 선교의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 진학을 고민할 때가 되자 늘 어렵게 사시는 부모님을 보고 마음이 바뀌어 먼저 돈을 많이 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지려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할 듯해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 이상하게 그날부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도 원인을 찾지 못했고, 도저히 공부를 더는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휴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은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나의 욕심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사로운 제 욕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저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나의 건강이 회복된다면 간호학과에 진학해 사람 몸을 돌보는 공부를 하겠으며, 기독교 단체에 들어가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여 선교사가 되겠다고요.
기도는 응답되었고, 저는 대학 4년 동안 선교 단체에서 열심히 제자 훈련을 받으며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고 선교단체 훈련도 받았지만, 여전히 율법적인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저 자신을 발견하고는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어느 날 주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이렇게 졸업은 못 하겠습니다. 졸업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게 해주세요.”
그 당시, 저는 다시 한번 육체의 질병을 통해 철저히 고립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만이 나의 위로와 양식이 되는 눈물의 광야를 통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로마서의 말씀 “사랑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채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율법입니다.”라는 말씀을 통하여, 저를 만나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병도 고쳐주셨습니다. 사랑이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복잡하
게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영적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까요? 그 말씀은 저에게 참 자유를 주었습니다.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은 모든 섬김과 봉사는 섬기는 이나 섬김을 받는 이 모두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선교와 호스피스 사역에 관심이 컸던 저는 졸업 후 병원에 근무하면서 독신 선교사로 나갈 기회를 찾았으나 길은 잘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선교와 호스피스 사역의 신학적 바탕을 배우기 위해 장로회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저에게는 주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지 못한 두 가지 영역이 있었습니다. 바로 결혼과 재정에 관한 것입니다. 가난한 목회자의 자녀로 자란 저는 일찍이 다짐한 바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목회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는다와 다른 하나는 선교 활동은 하되 자비량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조지 뮬러처럼 나의 필요를 하나님 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음에도 나의 필요를 놀랍도록 넘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결혼과 재정의 문제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그곳이 어디든지 주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겠다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학대학원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졸업 후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에서 훈련을 받고 필리핀으로 파송받았습니다.
2. 선교사와 만남
선교지에서 배운 교훈 가운데 하나는 열린 마음으로 현지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필리핀에 도착한 후, 솔리토 토케로(Solito K. Toquero) 감독님께서 장로교 출신이었던 남편과 제가 연합감리교회를 배울 수 있도록 마닐라 중앙감리교회(Central United Methodist Church)의 협력 목사로 섬기도록 소개해 주신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담임 목사이신 호머 레푸에르조(Homer Refuerzo)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느 날 저희가 호머 목사님께 “좋은 선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너희가 겸손히 물으니 내가 솔직히 말하겠습니다.”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한인 선교사가 영어도 잘 못하고, 필리핀 말은 배우려고도 하지 않아요. 돈은 많아서 교회 건물만 짓다가 떠납니다. 건물과 일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일하길 바랍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많이 놀랐습니다. 보통 필리핀 사람들은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호머 목사님은 과거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 선교사였던 리처드 워먼(Richard Wehrman) 목사님이 지도자로 키워낸 분이었습니다.
저는 호머 목사님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늘 현지인과 함께 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호머 목사님의 조언은 남편과 저의 청년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청년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오래된 외부 의존성을 직시하고 거기서 벗어나 건강한 자립성을 키우기 위해 함께 노력했습니다. 청년들과 김치를 만들어 현지 교회를 방문하며 파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년연합회가 부흥하고 스스로 자리 잡아가는 것을 보며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호머 목사님이 저희에게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이가 들면 계속 청년 사역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는 미래 사역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현지인과 더 가까워질 만한 역량 개발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선교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선물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당시 제가 일하던 필리핀 연회에는 120여 교회가 있었는데, 저와 남편은 매주 여러 교회를 방문했고, 저는 특송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자 여러 현지 목사님께서 필리핀 교회는 음악 사역이 중요하니 저에게 성악 공부를 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한 현지인 친구의 도움으로 교수님을 소개받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음악은 제가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작은 꿈인데 하나님께서 선교지에서 저에게 허락하신 깜짝 선물과 같았습니다.
처음 선교지에 갈 때는 나를 희생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부족한 저를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하신 것 자체가 큰 축복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현지 목사님들의 조언에 따라 시작한 음악 공부를 통해 필리핀 사람들의 삶, 문화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 너무나 큰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3. 선교사와 배움
필리핀 사람들은 시간 약속을 잘 안 지킨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저 역시 초창기 청년 사역을 할 때 늦게 오는 청년들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음악 공부를 하면서 에어컨도 안 되는 대중교통 수단을 타고 다니게되자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더위와 매연 탓에 1시간만 지프니(필리핀 대표적 대중교통 수단으로 지프차를 소형 버스로 개조한 것)를 타도 머리가 어지럽고, 메스껍고, 몸의 기운이 빠져나갑니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갑자기 홍수가 나고, 차들이 움직이지 못해 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합니다.
가난한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 대부분이 근기 없는 쌀밥과 짠 음식이기에 금방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모임에 종종 늦고, 제때 와도 바로 일을 할 수가 없고, 쉬거나 간식을 먹어야 기운을 차려서 모임을 할 수 있습니다. 잠시라도 현지인이 사는 대로 살아보면 현지인이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필리핀 사람들이 게으르다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필리핀 노동자는 최저임금을 받고 하루 종일 일합니다. 사실 그들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 불의한 사회구조 아래서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기에 열의를 내서 일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과연 내가 그 입장이라면 저들보다 더 성실히 일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보았을 때,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리핀 선교를 통해 저에게 음악 공부를 시키셨고, 현지인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사역도 하고 자녀들도 돌보며 한 음악 공부는 제가 청년 사역을 마친 후 여자 전도사님들을 교육하는 해리스 메모리얼 대학교(Harris Memorial University)에서 일하는 데 귀하게 쓰였습니다. 해리스 대학에서는 간호사로서 지역보건센터를 통해 빈민 지역과 원주민을 위한 건강보건 사역과 교회 음악 사역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4. 선교사와 영성
필리핀 사역 15년이 되던 무렵 영적 침체가 찾아왔습니다. 남편은 신학교 사역으로 주로 주말에 집에 오고 저는 사춘기를 겪는 두 아들과 씨름하며 일할 때였습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영적 회복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던 저는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제 영혼을 회복시켜 당신의 마음으로 선교할 수 있도록 하시든지, 아니면 저를 선교지에서 떠나게 해주세요.”
또 하루는 너무 답답하여, “하나님, 어떤 고난을 통해서라도 내 영혼을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 몸이 아픈 것을 통해 주님을 경험한 기억이 났고, 혹시 내가 아프려나?”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 큰아이에게 뇌하수체 종양이 발견되었고, 저희 가정은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오가며 약물 치료를 하던 중 종양에 출혈이 생겨 응급 뇌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간호사로서 수술실에 근무했던 저는 담당 의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가장 수술을 잘한다는 선생님으로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응급수술을 해야 할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은 3개월 휴가를 간 상황이었고, 그분 대신 젊은 의사분이 수술을 맡게 되었습니다. 너무 염려되어 다른 유명한 의사를 찾느라 백방으로 알아보던 중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은하야, 너는 네 아들을 살리고자 최고의 의사를 찾고 있느냐? 나는 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 늘 최고의 선교사를 찾고 있단다.” 그 말씀 앞에 저는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수술 당일, 아들을 수술실에 들여보내며 불안하고 걱정되어 안절부절못하는 제게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은하야 걱정하지 말아라. 넌 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수술실로 보내지 않느냐? 나는 내 아들 예수를 내어주기 위해 세상에 보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고 참 많이 울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으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십시오. 나의 자식만을 위하여 이런 눈물을 흘리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혼들을 위해 이런 눈물을 흘리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이제 그런 주님의 마음으로 선교하는 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5. 애틀랜타
아들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장래를 위해 기도하던 저와 남편을 하나님께서는 애틀랜타에 있는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 주재선교사로 이끄셨습니다. 본부 주재선교사로서 저희에게 가장 힘이 되는 시간은 현장에서 열심히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일대일로 온라인으로 만나 교제하면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들 그리고 은퇴 선교사님들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본부 주재선교사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모든 선교사님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서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선교하도록 중보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의 선교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생명줄이 바로 주님 안에 거하고 날마다 성령 안에 깨어 있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치지 않으면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신실하게 섬길 일꾼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부르신 자리에서 주님의 그 애타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선교적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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