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로, 영화<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에 대한 현혜원 목사의 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혜원 목사, 제공 현혜원 목사.처음 <헝거게임>을 봤을 때 그 잔인함에 영화관에서 까무러칠 뻔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미국 10대에게 인기 있는 소설을 영화화했다기에 봤다가, '이런 내용을 10대가 읽고 본다고?' 싶을 만큼 충격을 받은 영화입니다.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그 잔인한 시작을 알리는 프리퀄입니다. 사실 잔인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제가 좋아하는 배우인 피터 딘클리지가 나온다기에 주저 없이 영화를 봤지요. 몇몇 믿고 보는 배우들이 있는데, 피터 딘클리지가 그중 하나입니다.
<헝거게임>의 기본적인 배경은 이렇습니다. 미국이 멸망하고 북미 대륙에 새로운 제국 '판엠(Panem)'이 탄생했습니다. 이 판엠의 수도이자 모든 권력과 부의 중심지 캐피톨이 12개 속주를 식민지처럼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통치자들은 매년 각 속주에서 어린 남녀 두 명씩을 강제 징집합니다. 그들을 '헝거게임'이라 불리는 생존 게임에 참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거대한 아레나에서 마지막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진행되는 잔인한 게임입니다. 속주의 시민이라는 이유 하나로 24명의 아이는 죽음의 게임에 강제로 내몰립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아이들을 죽여야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게임의 목적이 단순히 생존을 건 잔인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캐피톨은 이 게임을 전국에 생중계함으로써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둡니다. 일반 시민과 속주민에게는 체제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주고, 캐피톨은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쇼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취합니다. 24명 중 마지막에 살아남는 단 한 명은 어마어마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지요. 우승자가 벌어오는 부와 명예는 12개 속주에는 피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피지배층의 저항심을 꺾는 동시에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정교한 통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는 본편의 악의 화신 코리올라누스 스노우가 어쩌다 악당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작중 세계관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코리오(코리올라누스의 약칭)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그는 캐피톨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의 외동아들로 부족할 것 없이 태어났지만, 어릴 때 지금은 사라진 13번 속주의 반란에서 아버지를 잃습니다.
할머니와 사촌 누나 티그리스의 손에 자란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운 탓에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렵게 성장합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캐피톨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은 이 비참한 어린 시절을 감내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주죠. 그는 귀족 자제들만 다니는 엘리트 학교에서 항상 수석을 차지하는 겉으로는 매력적이고 지적인 청년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의 가난을 친구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고 화장실 타일을 갈아 셔츠 단추로 달아야 하는 고달픈 이중생활을 하고 있죠.
나날이 늙어가는 할머니,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촌 누나 티그리스를 위해 그는 꼭 성공해야만 합니다. 캐피톨에서 출세하려면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의 집에는 돈이 없습니다. 결국 그는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만 한다는 절박함으로 학업에 매달립니다. 열여덟 살의 코리오는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고 아버지처럼 성공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그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내내 양면적입니다. 열여덟 살의 그는 12번 속주, 지금의 미국 애팔래치아 산속 탄광 지대 출신인 루시 그레이를 만나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집니다. 또 헝거게임이라는 잔인한 게임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캐피톨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신이 호감을 느끼는 루시 그레이를 이용해 자신이 성공할 계획을 끊임없이 세웁니다. 또 자신이 경멸하는 체제를 대표하는 헝거게임을 발판 삼아 위로 올라갈 방법을 집요하게 모색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할머니와 티그리스를 위한 것이지만, 자신의 야망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루시 그레이를 살리고 싶다면서도 자신의 출세를 위한 일들을 주도면밀하게 진행하지요. 그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두 가지입니다. 일견 선해 보이는 것과, 그 뒷면의 철저히 자신을 위한 것. 그리고 그 양면 모두 그의 진심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이 양면성이 불편했습니다. 마냥 선한 이가 타락해 악인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황에 내몰린 자가 야망과 성공에 대한 타고난 감각으로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요. 선함과 악함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함을 가장해 자신의 성공을 쟁취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성공이 객관적으로 나쁜 것은 아닐 텐데, 왜 이렇게 그의 양면성이 저를 불편하게 했을까요.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루시 그레이를 도와 헝거게임에서 우승하게 합니다. 그러나 편법을 써서 루시 그레이를 도운 사실이 발각되어 코리오는 예정되었던 전액 장학금을 받지 못하고 속주로 쫓겨나게 됩니다. 그는 루시 그레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그녀가 사는 12번 속주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겠다고 자원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리워하던 루시 그레이를 다시 만나 짧지만, 행복한 한때를 보냅니다. 서로를 완벽히 믿으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사랑하면서요.
둘이 손잡고 아무도 없는 너른 들판을 걸을 때, 루시 그레이는 이런 이야기를 건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 세상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어. 아레나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처럼. 내 생각에 우리는 다 선하게 태어난 것 같아. (이때 코리오는 코웃음을 칩니다.) 아니, 진짜로 말이야. 악으로 넘어가느냐 마느냐는 우리가 평생 해야 할 숙제 같은 거야."
루시 그레이의 이 말은 영화의 주제와도 같아 보입니다. 속주에서 태어났지만, 집시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루시 그레이는 끊임없이 신뢰, 사랑, 자유, 희생을 선택합니다. 이후 <헝거게임>의 진짜 주인공인 캣니스를 떠올리게 하죠.
그러나 훗날 캣니스와 12개 속주의 반란군을 섬멸하려는 대척점에 서게 되는 코리올라누스는 악의 화신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선과 악의 양면을 모두 지닌 인물입니다. 적어도 그가 내어놓는 이유에서는 말이죠. 결국 제가 보기에 영화는 선의 대척점이 악이 아니라 야망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 그는 루시 그레이와 헤어지고 (혹은 죽이고-영화는 자세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다시 캐피톨로 돌아옵니다. 그의 야망과 능력을 눈여겨보았던 굴 박사 덕분에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들어가고, 그렇게 그는 캐피톨 정치의 정점에 서게 됩니다. 영화 마지막, '헝거게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굴 박사에게 그가 내어놓는 대답은 그가 어느 편에 서기로 결심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헝거게임은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아레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죠. 그래서 매년 개최되어야 합니다."
영화 초반, 코리오는 헝거게임을 속주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캐피톨이 사용하는 잔인한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아레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일 뿐이며, 세상 자체가 매일 벌어지는 잔인한 생존 게임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이라는 생존 게임의 승리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50여 년 동안 캐피톨과 12개 속주를 다스리는 독재자로 군림합니다.
저에게 코리오의 양면성이 불편했던 이유는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선한 의도와 자신을 위한 계산이 한마음 안에 공존하는 일은 아레나 밖 우리의 일상에서도 매일 일어나니까요. 그런 점에서 영화는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입니다. 선의 대척점은 악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하니까요. 아니, 야망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이 바로 ‘악‘이라고 선언하는 듯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다닌 교회의 어느 해 청년부 수련회 주제가 “청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였습니다. 아마 꿈을 품으라는 의미였던 것 같은데, 하나님 안에서 꿈을 품고 꿈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서 꿈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큰 꿈, 큰 야망을 품고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들었을 뿐이지요. 그 수련회에서 사랑과 자유, 신뢰와 정직, 참됨과 정의 같은, 진짜 ‘큰 꿈’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정직하게’ 이뤄가야 하는지도 들었더라면 지금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실제 스노우(코리오의 성) 같은 사람들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시 그레이의 말처럼 악으로 넘어가느냐 마느냐는 평생의 숙제입니다. 악을 세상에 불러들이는 것은 우리의 야망이라는, 일견 낯설고도 현실적인 영화의 선언 앞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 희생, 자유, 평화, 신뢰처럼 선한 것들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을까요? 스노우는 그 숙제 앞에서 "세상이 원래 아레나"라고 답했지만, 우리는 다른 답을 쓸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이는 뱀이 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향해 노래하는 새가 될 것인지, 영화는 그 선택이 매일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30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무엇이 우리 앞에 놓인 생명과 복이고, 그것들을 선택하는 길일까요? 그 점을 우리 교회가 더 생각하고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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