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로, 영화<오디세이(The Odyssey)>에 대한 현혜원 목사의 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혜원 목사,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진실은 작은 디테일에 숨어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보고 난 후, 영화관 의자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머릿속을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꼬리를 붙잡으려 애썼습니다.
어릴 적 읽은 〈오디세이아〉에서 읽고도 무심코 지나친 작은 디테일들 속에, 이토록 큰 진실이 담겨 있었다니. 놀란의 영화는 그것을 확성기에 대고 말하듯 크고 또렷하게 울려 퍼지게 했습니다.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자의 시각이 얼마나 중요하고, 강렬하며, 인상을 줄 수 있는지,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많은 이들이 자라면서 한 번쯤 접해보았을 고전입니다. 저 역시 신과 운명의 장난에 맞서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유독 좋아해 책장이 닳도록 읽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구체적인 내용은 희미해졌지만, 그 장대한 서사가 주던 강렬한 감각만은 여전히 제 안 어딘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어릴 적 제가 영웅이라 믿었던 그들이 사실은 잔인한 전쟁광에 불과했다면 어떨까요. 전쟁이란 결국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학살일 뿐이라면 말입니다.
영화는 제가 놓친 디테일을 하나씩 되짚게 해줍니다. 그중 하나가 아가멤논이 트로이 출정 직전 자신의 세 딸 중 첫째인 이피게네이아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전승에도 남아 있지만, 대개 여신 아르테미스가 마지막 순간에 딸을 사슴으로 바꾸어 구해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이 장면은 영웅 서사를 즐기던 어린 날의 제게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나 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죠. 영화를 보는 내내 ‘아버지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를 어떻게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했을까?’ 하는 충격이 온몸을 감쌌습니다. 10년 후,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아가멤논을 기다리던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을 죽여 딸의 원한을 갚습니다.
헬레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나선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메넬라오스의 궁전에서, 트로이 전쟁의 명분이 되었던 그 헬레네를 만납니다. 영화 속 그녀는 자신의 이름으로 시작된 전쟁과 그로 인해 잿더미가 된 한 문명을 지켜본 사람으로, 그 모든 회한을 껴안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굴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 있고, 삶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듯 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어릴 적 제가 읽은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남편과 화해하여 트로이에서 다시 스파르타로 돌아가 오랫동안 평온하게 살았다고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정리될 리 없는데도 말입니다.
글의 여백과 행간에 숨어 있는 마음을 읽어내는 것. 진실을 가리고자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넘어, 그 안에 담겨 있는 숱한 이야기를 온전히 듣고자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놀란이 이 영화를 통해 〈오디세이아〉와 〈일리아스〉를 새롭게 해석한 의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의 결정적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의 전쟁에 지친 그리스 연합군은 오디세우스의 계획에 따라 거대한 목마를 종전의 선물로 남겨두고 전격 철수합니다. 트로이 사람들은 오랜 세월 자신들을 괴롭힌 적이 남긴 선물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저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크세니아(Xenia), 곧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대접하는 환대와 호의는 신성한 관습이자 윤리적 법칙이었습니다. 비록 적이 남긴 것일지라도 평화의 뜻으로 건넨 것이라면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명예와 정의를 위해서라도요. 그렇게 그들은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오고, 온 도시가 종전을 기뻐하며 축제를 벌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잠든 한밤중, 그 ‘평화의 선물’ 안에서 그리스 별동대가 쏟아져 나와 성문을 엽니다. 돌아가는 척하며 떠났다가 되돌아와 성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군은 어둠을 틈타 성안으로 몰려듭니다. 신의 가호로 10년을 버텨온 성은 그렇게 허망하게 함락되고 맙니다.
곱씹어볼수록 야비하고 치졸하며,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비열한 술책입니다. ‘평화의 선물’이라 이름 붙인 그것으로 한 도시의 몰살을 가져오다니요. 어떻게 이것을 어릴 때의 저는 ‘영민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승자의 목소리로 듣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눈물과 고통을 축소하고 자신의 이야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지, 3,000년 전에 쓰인 서사시를 통해서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트로이 성에 손쉽게 들어온 그리스군은 도시를 단 하루 만에 폐허로 만듭니다. 고향과 가족을 떠나 10년 동안 지지부진한 전쟁을 치르며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군인들은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무너뜨리고, 불태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불태웁니다. 여자도 아이도 가리지 않고 학살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계획이 현실이 되어 펼쳐지는 광경 앞에서 무너집니다. 자신의 아이디어 하나로 한 문명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는 일, 그것이 ‘평화’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얄팍한 속임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그는 그 충격과 자책, 수치의 무게를 한꺼번에 짊어진 사람처럼 완전히 마비된 듯 보입니다. 트로이를 하룻밤 만에 잿더미로 만든 후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그리스 군인들 사이로, 그는 수치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숨듯이 성을 빠져나옵니다.
그 후 그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한 달이면 닿을 귀향길에서 그는 낯선 항로를 고집하고, 그 선택은 10년을 돌고 도는 긴 여정이 됩니다. 전쟁 내내 그토록 지혜로웠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잘못된 결정을 거듭하며, 결국 생사고락을 함께한 병사들을 모두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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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신 칼립소의 섬에서 7년 동안 기억을 잃은 채 보냅니다. 원전에서 그는 여신에게 붙들려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영화 속 그는 기억을 지우는 연꽃잎을 자청해서 먹습니다. 트로이를 멸망시킨 자신에 대한 혐오, 자기 때문에 죽어간 얼굴들, 그리운 아내와 아들, 그리고 이렇게 망가진 채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고향 이타카. 그 모든 번뇌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는 기꺼이 망각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두 잊어버립니다. 한동안 그는 그렇게 칼립소와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그 7년이 상처 입은 사람의 의식 세계를 정확하게 그려낸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지닌 많은 이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잊는 쪽을 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 저편으로 가라앉힌 상처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사라지지 않는 전쟁에 대한 꿈과 스스로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갈망에 이끌려 뗏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는지 아는 칼립소의 도움으로 기억을 되찾고, 그는 마침내 다시 항해에 나섭니다. 자신의 과거와 상처, 미래,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마주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와 아내 페넬로페와, 이제는 성장한 아들 텔레마코스와 재회합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7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트로이가 장악하고 있던 무역로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전쟁의 배경에 있었고, 파리스와 헬레네의 이야기는 그 전쟁을 설명하기 위한 신화적 명분이었다는 해석은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3,000여 년 전 쓰인 서사에 오늘날의 세상이 그대로 투영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수단과 규모가 달라졌을 뿐, 소수의 욕망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죽고, 찬란했던 문명이 잿더미가 되는 일이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역사에 새삼 아득해집니다.
매주 강단에 서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전하는 저에게, 이 반복되는 죽음의 서사시는 무거운 질문으로 남습니다. 조금은 더 나아지리라는 너무나 가냘프고 연약한 희망을 품고 사는 우리는, 대체 이 서사의 어디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요?
원작과 달리, 영화의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를 떠나 다시 먼 항해를 떠납니다. 자신 탓에 죽어간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미지의 서쪽 바다로 향합니다. 저는 이 마지막 선택이야말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진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상처 입힌 사람 앞에서 직접 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상처 입은 자가 진정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입힌 상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용서를 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으로 그는 다시 시작합니다.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그는 다시 바다로 나아갑니다.
돌아보면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영웅의 모험담이 아니었습니다. 상처를 안고, 그럼에도 살아가려는 한 사람이 그 상처와 마주하기까지의 길고 긴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잊으려 했고, 도망쳤고, 오래 헤맸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입은 상처든 우리가 입힌 상처든, 마주하기 전까지는 어디에도 진짜로 도착할 수 없습니다. 이타카에 닿는 것이 여정의 끝이 아닌 이유입니다. 그러니 진짜 귀향은 잊었던 것을 기억해 내는 자리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용기 있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모자람을 마주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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