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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 우리는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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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로, 현혜원 목사의 영화 “더 웨일(The Whale)”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견에 대하여

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

2020년 2월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로 여행을 갔습니다. 당시 미국은 아직 코로나19가 퍼지지 않았지만, 유럽과 아시아는 바이러스가 휩쓸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발원한 탓에 유럽에서는 아시아인을 향한 테러와 폭력이 빈번히 발생하여 아시아인은 각별히 안전에 조심하라는 주의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여행을 하는 동안 특별히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카고로 돌아오기 전날, 온종일 걸어 다녀 몹시 피곤한 몸을 끌고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웨이터가 문을 가로막으며 예약이 꽉 차서 들어올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레스토랑은 프랑스 백인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한 테이블이 비어 있었고, 예약 표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죠. 친절하지 않은 말투, 적대적인 눈빛 그리고 문을 가로막는 무례한 태도는 마치 너희 같은 아시아인은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모멸감과 분노를 느꼈지만, 발길을 돌려 나올 수밖에요.

환상적이었던 여행길의 마무리에 당한 터무니없는 박대(薄待)는 오히려 제가 차별과 폭력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었고, 서강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신 고 장영희 선생님이 1999년 7월 월간<샘터>에 기고한 ‘킹콩의 눈’이 기억났습니다.

그 글의 일부입니다.

"그날은 내가 Y 대학에서 박사과정 시험을 친 날이었다. 석사 졸업반이었던 나는 딱히 직업을 얻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고, 당시 나의 모교에는 박사 과정이 개설되기 전이라 내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응시자들은 오전에는 필답고사를 보고 오후에 면접하게 되어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실에 들어서니 네 명의 교수가 반원으로 앉아 동시에 나와 내 목발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엉거주춤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그중 한 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학부 과정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아요. 박사 과정은 말할 것도 없지요.'

한 사람의 운명을 그렇게 단도직입적이고 명료하게 선언하는 그 교수 앞에서 나는 차라리 완벽한 좌절, 완벽한 거절은 슬프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마음이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미소까지 띤 얼굴로 차분하게 '그런 규정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인사말까지 하고서 그 면접실을 걸어 나왔다.

그날 집에서 기다리시는 부모님께 낙방 소식을 전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지연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본 영화가 <킹콩>이었다.

그 영화에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단지 단편적 이미지의 연속뿐이다. 거대한 고릴라가 사냥꾼들에게 잡혀 뉴욕으로 옮겨지다 도망하고,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옆에 앉아 있는 킹콩은 그 건물만큼이나 크고 거대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킹콩은 한 여자를 손에 쥐고 있었고, 경악한 그 여자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킹콩은 그녀를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러나 킹콩은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포획되기 전, 킹콩은 그 여자를 자신의 눈높이로 들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 눈, 그 슬픈 눈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아닌 커다랗고 흉측한 고릴라였기 때문에.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 내가 바로 그 킹콩이었다.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내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여 아무런 할 일 없이 여생을 보내야 하는 삶, 그것도 하나의 사형선고였다.

킹콩이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살고 싶었다. 나는 편견과 차별 때문에 죽어야 하는 괴물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영화관을 나와 집에 오는 길에 토플책을 샀고, 다음 해 8월 나는 전액 장학금을 준 뉴욕 주립대학으로 갔다."1

피부색 때문에, 서류미비자이기 때문에, 악센트가 있는 영어를 쓰기 때문에, 미국 사회의 주류와 ‘다르기’ 때문에, 아시아인인 우리는 종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매달린 킹콩처럼 여겨집니다. ‘나의 세상’을 침입한 다른 ‘너’는 마치 코로나바이러스처럼, 그리고 흉측한 킹콩처럼 ‘나와 나의 세상’의 안전을 해할 존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자인 우리는 킹콩의, 그리고 장영희 선생님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 낯선 이들로부터 듣는 “Go back to your country, Chinese monkey!”는 킹콩을 향한, 코로나바이러스를 향한, ‘그들의 세계’에 침입한 타인을 향한 적대(敵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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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그러한 배제와 박해를 겪은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타인을 환영하고 환대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고 믿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22:21, 23:9)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이방의 땅을 살아가는 영원한 나그네로서 다른 나그네들을 하나님과 같은 긍휼의 마음으로 품고 조건 없이 환대하는 특별한 소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마치 상처를 입은 이가 오히려 치유자가 되어 다른 상처 입은 이를 보듬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혹시 우리는 누군가를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킹콩처럼 보고 적대하고 해하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요? 누가 우리 세계의 킹콩인가요?

올해 메이저 영화상 시상식을 모두 휩쓴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영화 <더 웨일(The Whale)>은 편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영혼에 관한 광대한 탐구와 진정성, 유머를 잃지 않는 캐릭터, 그리고 슬픔과 강박, 구원을 섬세하게 보여준 깊은 감동이 담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지요. 오래전 <미이라>라는 유명한 영화에 나왔던 브렌던 프레이저가 주인공 찰리로 나옵니다. 새뮤얼 D. 헌터의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프레이저의 인생 역전을 일궈준 보물 같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찰리는 272kg에 육박하는 고도비만의 은둔자입니다. 결혼해서 아내와 딸이 있었으나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만난 제자 앨런을 통해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는 그렇게 가족을 버리고 앨런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나고 자란 앨런은 교회의 가르침과 자신의 정체성의 갈등 사이에서 화해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하고 맙니다. 앨런이 자살한 후 찰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렸고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폭식을 선택합니다.

영화 “더 웨일(The Whale)” 포스터. 사진 출처, cine21영화 “더 웨일(The Whale)” 포스터. 사진 출처, cine21.

앨런의 죽음이 가져온 상실감과 비탄, 아내와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찰리는 강박적 폭식으로 자신을 파멸로 이끕니다.

거대한, 마치 고래와도 같은 체구를 가지게 된 찰리는 사람을 피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그를 피해 달아납니다. ‘남들과 다른’ 사람인 찰리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됩니다. 그에게 말도 걸어보지 않은 채, 거대한 몸을 가졌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정죄하고 마치 흉측한 킹콩을 바라보듯 뒷걸음질 치며 도망칩니다.

신학자 레티 러셀(Letty M. Russell)은 그의 책<공정한 환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환영>2에서 교회의 본질이 ‘환대(歡待, hospitality)’라고 말합니다.

프랑스의 레스토랑에서 박대받은 저는 러셀의 이 정의가 마음 깊이 박힙니다. 세상 다른 모든 곳이 나를 박대해도, 교회는 나를 ‘무조건 환대’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를, 그리고 하나하나 우리 모두를 조건 없이 환대하십니다.

환대는 ‘낯선 이(Stranger)’를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낯선 세 사람을 환대하고 접대했듯이 말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일 아침이면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들을 “환영하며” 맞이합니다. 그 환영(welcome)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혹시 그 환영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요? 피부색 때문에, 생경한 신체적, 정신적, 영적 특징 때문에, ‘낯설기(strange)’ 때문에, 교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9) 말씀에 따라 우리는 교회에 오는 모든 이들, 그들이 낯선 이방인이든지, 죄인이든지, 심지어 킹콩이라 해도 환영하고 사랑하기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말 그대로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교회의 가르침과는 다른 삶을 살더라도,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신 것처럼 정죄하지 않고 그저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길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편견으로 인한 고통이 커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에 왔을 때 하나님의 조건 없는 환대를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폭식으로 거짓 평화라도 얻기를 원하는 이가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 모든 곳에서 박대받아도 교회에서만큼은 환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앨런과 찰리가 용기를 내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들을 하나님의 환대와 환영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천국을 이곳에 불러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중반에 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가 없어.(People are incapable of not caring).”

인간은 타인을 돌보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반가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명, 타인을 돌보는 존재라는 소명으로 오늘 하루가 아름답게 빚어지기를 기도합니다.

) 1. 장영희 박사님의 소회 부분은 베리타스에 실린 장윤재 목사님의 글에서 가져왔습니다. https://veritas.kr/news/35575# 발췌 2023년 7월 21일

2. Letty M. Russell, Just Hospitality: God's Welcome in a World of Difference, ed. by J. Shannon Clarkson and Kate M. Ott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Knox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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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의 이튿날,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컨벤션센터 본회장에서 대의원들이 아침 예배를 드리고 있다.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연합감리교회 총회에서 배우는 것들

연합감리교회의 2020 총회에 예비 대의원으로 참여한 김정호 목사의 소회를 담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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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마음의 정원’이라는 이름의 기도실이 운영된다. 영어, 한국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 등 여러 언어로 쓰인 기도문과 성경 구절 책자도 구비되어 있다. 사진은 기도실에 마련된 3곳의 기도 제단 중 하나이다.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총회 참석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기도실

총회 참석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마음의 정원’이라는 이름의 기도실이 운영된다. 영어, 한국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스와힐리어 등 여러 언어로 쓰인 기도문과 성경 구절 책자가 구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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