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혼 이야기>와 의정서

“결혼 이야기(Marriage Stor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목과는 달리 한 부부가 이혼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남편은 뉴욕에서 연극 연출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고, 아내는 결혼 전에는 LA에서 전도유망한 배우였으나, 남편을 따라 뉴욕으로 온 후로는 남편의 연극에 배우로 출연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결혼생활에서 자신의 자아가 상실되고 있다는 느낌을 저버리지 못하고 결국 이혼을 요구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혼 조정관의 요청으로 상대의 장점을 적어 읽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둘이서 평화롭게 이혼 과정을 밟자고 동의했지만, 이혼 전문 변호사들이 부부 사이에 개입하면서, 이혼 과정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변호사들은 남편과 아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를 해체하여, 상대방의 약점을 잡으려 혈안이 됩니다.

상대방을 칭찬했던 것은 그만큼 자신에겐 불리한 증거가 되고 상대방의 사소한 모습, 예를 들어 저녁에 마신 와인 때문에 층계를 내려오다 잠시 비틀거렸던 아내의 모습이나, 자동차에 어린이용 카시트를 튼튼하게 고정하지 않았던 남편의 실수는 아이를 양육할 자격이 안 된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이혼 과정으로 돈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가 소모되고, 아울러 사랑했던 감정이 고갈되어 서로를 향한 미움과 원망을 넘어 혐오로 가득하게 됩니다. 급기야는 상대방을 향해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발악하듯 잔인한 악담을 퍼부으며, 치명상을 주고받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스스로 놀라 통곡합니다.

올 초, 교단 대부분의 그룹이 서명한 <결별을 통한 화해와 은혜의 의정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말합니다.

“가장 합리적인 의정서다.”

“차라리 잘되었다.”

“잘못되었으니 거부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교단의 엘리트들끼리만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저는 결국 이렇게 분열이 현실이 되어가는구나 싶어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이고, 마음이 착잡해졌습니다.

합의서는 “결별”이란 단어를 사용했지만, 내용을 보면 이미 “분열”입니다.

위에 언급한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별거”가 아니라, “서로에게서 방향을 돌려 각기 다른 길을 가는”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완전히 나누기 복잡하니 재정의 일부분인 연금만은 예외로 했을 뿐입니다. “화해”와 “은혜”가 “결별”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뉘앙스를 주려 했지만, “화해”는 “함께 모인다, 연합한다, 감정에 있어 하나가 된다”는 어원적 의미가 있으니, “결별”을 통해 화해한다는 것은 사실 모순(antilogy)입니다.

타인종 목회를 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분리의 상황이 더욱 불편합니다.

신앙의 토대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타인종 목회는 차이/다름을 전제로 합니다. 다름은 내 인식의 틀을 벗어나기에 알지 못함 (unknowing)의 영역입니다. 환대하여 맞아들인 낯선 사람이 언제 내 생명을 빼앗는 강도로 돌변할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름은 위협과 불안 및 경계의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차이를 넘어서서, 사랑의 힘으로 목회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도 그분과는 무한한 차이가 있는 우리 인간 피조물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요 1:14).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써 나누인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증오”의 벽을 허무셨습니다(엡 2:14).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줄 알았습니다(고전 9:22).

“완전히 이해하진 못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는 말처럼, 차이를 넘어 다가가는 거룩한 신축성이 타인종 목회를 하며 추구해온 신앙적 가치였는데, 그런 차이를 못 넘고 분열을 하다니요. 차이는 불안과 경계를 가지고 분리하려는 대상이 아닌, 서로를 품어야 할 사랑의 조건이요, 서로를 채우고 풍요롭게 만드는 자산입니다.

바울은 옥중에 갇힌 몸으로 이렇게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1-6).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전한다고 고백하면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하셨다.”라는 구절은 목청껏 노래하는 우리가 동성애에 대한 서로의 의견 차이 앞에서 분열 이전에, 자신이 입은 상처를 절대화하기 이전에, 우리는 과연 하나가 되려고 “힘써 지키려”는 노력을 끝까지 다 해 본 것인지요?

물론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말한다는 것은 전제적이고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큰 틀 안에 함께 머물면서 서로의 독특성과 개성을 인정하는 일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고 갈라선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이혼의 가능성에 관해 묻습니다(막 10:2-12).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했노라고(신 24:1-4) 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모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hardness of heart)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태가 더 악화되어 무질서하게 되는 것을 막으려고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제한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관계를 모색하는 일을 반대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창세기를 인용하시면서(창 1:27; 2:24)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복음 선포를 위해 함께 힘쓰던 사람들을 가리켜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라고 표현합니다(빌 4:3). “짝지어 주셨다”와 “멍에를 같이한다”는 말은 희랍어 원문으로는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결혼생활, 신앙생활, 교회생활은 모두 멍에를 함께 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세상에서 이혼은 통계상의 문제로 볼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영적인 피폐함과 육체적인 손상, 사회적인 관계망의 손상과 인생의 실패자라는 암묵적인 조롱 그리고 자존감(self-esteem)의 손상으로 인한 후유증은 홀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쓰라립니다. 또한 당사자뿐 아니라 사랑의 열매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강제로 감당해야 할 상처가 됩니다.

이처럼 갈등이 있다고 교단을 분리시켜 따로 가는 것은 어쩌면 예상 못 할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분리의 아픔을 감당해야 하고, 어쩌면 실족할지도 모를 회중 개개인에 대한 책임은 어찌하겠는지요?

교단의 현실을 보며, 과연 우리가 멍에를 같이 메는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서 분리에 이르게 된 것인지, 먼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적인 법의 테두리 안에서 분리를 모색해온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됩니다.     

처음 소개한 영화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혼 과정에서 관계의 마지막 선을 넘어, 서로의 치부를 드러낸 두 사람의 앙금은 이미 깊어졌습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후회한들, 서로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은들, 이젠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결국 아들은 엄마가 키우기로 합의하고, 서로에게 요구했던 양육비 명목의 돈은 서로 요구하지 않기로 하며, 이혼 과정을 마무리 합니다.

전처의 집에 와 있던 전 남편은, 아들이 방에서 엄마가 아빠의 장점에 관해 썼던 편지를 발견하고 읽는 소리를 듣고, 아들 곁에 와 함께 그 편지를 읽습니다.

“난 그를 본지 2초만에 사랑에 빠졌다. 난 평생 그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 영화는 전 아내가 아이를 안고 떠나는 전 남편을 불러 세워 쪼그리고 앉아 전 남편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묶어주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노아 바움백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패를 겪어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이전과는 달리 성숙한 사랑이 새롭게 시작되어 다시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혼의 끝자락에서 얻은 그 성숙한 사랑으로 이혼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터입니다.

어떤 분은 동성애에 대해 수십 년간 서로 다른 의견으로 실망하고 원망했던 앙금이 쌓였는데, 그것을 결혼제도라는 형식으로 묶어두어 그 상처가 더 곪도록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혼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노예제도 이슈로 분리가 되었지만,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하나가 된 경험이 있으니 비록 지금은 동성애 이슈로 나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다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혼의 가능성을 앞둔 이 마지막 시점에 우리 자신도 다시 한번 근원부터 깊이 성찰하며 왜 우리가 이렇게 멀리 왔는지를 짚어보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 됨의 가능성을 끌어안아야 하지 않겠는지요.

저는 우리 교단의 위계질서(hierarchy)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기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평범한 정회원 목사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소중한 자녀들인 모든 교인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줄 이혼의 가능성으로 인해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부부 당사자들입니까?

아니면 그 과정에서 이득을 챙기는 이혼 전문 변호사들입니까?

비록 우리가 교단 분리의 가능성에 직면해있다 할지라도 서로에 대한 첫사랑의 불씨를 살려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동성애 문제가 정말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제쳐두고 갈라서야 할 정도로 그렇게 큰 걸림돌입니까?

성서의 신앙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동성애에 관한 성서 본문을 읽으며 진정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보았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개방적이고 포괄적이야”라는 명분과 자존심에만 초점할 뿐, 실제로는 의견이 다른 이들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대화할 의지도 없이 편협한 모습만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까?

어느 정도까지 교단 또는 교회의 재산을 가지고 떠날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와 교인들을 볼모로 정치적인 계산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변화될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질 손익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입장을 확산하는 모임들은 빈번히 가지면서도, 함께 모여 뜨겁게 회개하며 하나님의 입장을 경청하려는 모임은 그만큼 가져보았습니까?

정치적인 계산 이전에 신앙의 근본을, 자신의 입장을 기정사실로 하는 대신에 공통적인 신학을, 보편적 정신(catholic spirit)과 일치를 그토록 호소했던 웨슬리의 뜨거운 가슴을 다시 끌어안으며, 이혼 막바지 상황에서 다시 그 이전의 상황으로 돌이킬 수는 없는 것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의롭기에 서로를 정죄한단 말입니까?

이혼 후에 평생 겪을 후유증에 아무리 의미를 부여한들 이혼하지 않은 것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이혼에 대한 성서 본문이 교회력을 따라 설교 본문으로 주어질 때면,  저는 마음이 찢어집니다. 저 자신이 이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서로를 나눌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맹세했지만, 불완전한 사랑밖에 할 수 없었던 제 모습에 절망합니다. 상대방과 자녀들 그리고 저 자신을 비롯한 저의 결혼을 축복했던 모든 이들에 대해 아파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할 뿐입니다.  

사랑과 이해가 무한하신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결혼의 실패를 성찰하며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하나이다.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한 영, 
치유하시는 영을 부어주소서. 

상처와 쓰라림의 기억을 치유해주시고, 
지난 일들을 잊을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절망스러운 감정이나 쓸모없다는 감정이 
물밀듯 닥쳐올 때, 
희망의 영이 솟아나게 하시고, 
또한 당신의 은총으로 인해 
어제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솟아나게 하소서. 

결혼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어온, 
우리의 허물을 
우리의 내면에서 발견할 때마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용서해 주시고, 
모든 일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를 성장하게 하소서.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우소서. 

과거의 노예가 된 우리를 해방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언제나 한결같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을 구하나이다. 아멘.  
(“Ministry with Persons Going through Divorce,” The United Methodist Book of Worship, p.626; 김선중 목사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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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감리교인들도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까?

만인성도주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연합감리교회에서는 11월 1일 <만인성도일(All Saints Day)> 또는 11월 첫 주일을 <만인성도주일>로 지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왜 연합감리교인들이 추모 예배를 드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지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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