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이 새려면 얼마나 더 남았느냐
코로나바이러스의 새 변이인 오미크론이 급격히 확산하면서 폭증한 환자로 병원마다 비상이 걸리고, 확진자의 격리 사례가 늘면서 인력난으로 인한 사회 시스템의 총체적 마비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코로나 백신이 보급되고 추가 접종이 이루어질 때만 해도, 팬데믹이 곧 종식되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옷을 갈아입듯 출현하는 신종 변이는 우리가 보내야 할 추운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따끔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언제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올 것인지 묻는 김종해 시인처럼, “파수꾼아 밤이 얼마나 지났느냐?, 파수꾼아 날이 새려면 얼마나 더 남았느냐?”고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김종해의 시를 함께 나눕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시인의 말대로 우리 인생에는 언제든 틈만 나면 풍파가 비집고 들어옵니다. 시련은 사람의 조건을 보지 않고, 인정사정없이 다가오며, 밀려오는 파도의 높이나 바람의 세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누구도 다가오는 풍파를 쉽게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차디찬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반면, 어떤 이는 몸을 납작하게 낮추어서라도 끝끝내 버텨내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렇게 사람들 간에 체감의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를 풍파의 세기 때문이 아닌, 이를 대면하는 사람의 자세 차이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똑같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어떤 사람은 남은 거리에 좌절하는 반면, 앞으로 남은 길을 지나온 길처럼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가 이 팬데믹 상황을 세계사적 사건으로 간주하며, 이 시기가 끝난 이후에도 전 세계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결국 교회가 맞이하게 될 환경 역시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다만, 새로운 환경의 변화가 기존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아니면 부정적인 방향으로 표출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지만, 지금 교회가 이 위기 상황에 대처해 나가는 모습에 따라 그 결과를 예측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따사로운 봄기운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는 희망찬 모습의 교회를 기대하는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날이 새려면 얼마나 남았는가?”가 아니라 “날이 새기를 기다리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위기와 재활성화 운동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2021년 1월에 발표한 '코로나19 정부 방역 조치에 대한 일반 국민 평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전년도 32%에서 21%로 급락했습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한국 교회의 신뢰도가 11% 하락한 것으로 보아, 팬데믹 기간에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부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젊은 기독교인 700명을 대상으로 한 '2021 기독 청년의 신앙과 교회 인식 조사'에서도 코로나에 대처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에 대해, 66.1%가 부정적이라 응답했습니다. 사회적 위기 상황에 교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교회 내부에서도 울려 퍼진 것입니다.
물론 인류의 역사에서 자연재해나 사회문제로 촉발된 위기가 신앙의 위기로까지 발전한 경우는 이번 경우에 국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었습니다. 사회적 위기에 신앙이 충분한 대책을 제공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생겨나는 이러한 일들은 결국 종교적 무능이 신앙의 위기를 가져오는 주범임을 자인하게 합니다.
대개 이러한 종교적 무능은 종교가 재앙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을 제공하지 못하거나 또는 종교가 재앙의 위기 상황 속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세상의 평가와 관련지어져, 종국에는 기존의 지배적 종교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만들고, 신흥 종교 운동이 창궐하게 하는 배경이 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같이 팬데믹으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동시에 위기 상황에 직면할 경우, 영향력을 잃은 기존 종교는 새롭게 신앙의 전환을 맞이하거나 아예 또 다른 형태의 종교로 이전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학자인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위기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종교적 움직임을 “재활성화 운동”이라 불렀습니다. 종교가 위기의 상황에 대처하는 역량을 재활성화함으로써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일치된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기 상황에 가장 적합한 인식의 틀을 제공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신학이나 이념적 사상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의 문자주의적 해석을 현실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무차별적으로 적용하거나, 아무 근거 없이 음모론을 받아들여 교회 안팎에서 극도로 비판의 칼날을 겨누는 것은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 이후, 교회의 신뢰도가 낮아진 여러 이유 중 하나를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주장한 ‘맹목적 신앙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지식 너머에 있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과 이성의 세계를 부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엄연히 과학적 이성으로 판별 가능한 상황조차 무시해 버리는 것은 오히려 믿음의 대상을 불분명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으며, 동시에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명백한 과학적 사실을 부정해 버리는 일은 매우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세상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기 위해 재활성화시켜야 할 또 다른 부분은 ‘신뢰 관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는 결코 사람들을 일치된 방향과 목적으로 동원할 힘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병이 발생할 때마다 교회가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사랑과 선행을 봉사와 공동체의 결속으로 현실화시키며 성장해 온 전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사회적 위기 속에서 교회를 신뢰하고 사람들이 굳건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원천이었던 것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언론에 노출된 교회의 모습은 이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교회가 어느새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장소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확진자가 교회에서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에 관한 대처 방식입니다.
팬데믹 초기만 해도 교회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주요 원인은 교회의 안일한 초동 대응이었습니다. 비대면으로의 전환을 주저하거나 교회 모임을 강행했던 일, 교회 내 확진 상황을 숨기거나 거짓 정보를 보건 당국에 전했던 것 등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았던 일 말입니다.
어려운 현실을 함께 극복해 가야 할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간의 신뢰는 안전과 결속 유지를 위해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신뢰 관계를 스스로 져버린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내부의 결속력을 깨뜨리지 않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체 공동체로부터 부정적 인식만 더 키웠을 뿐입니다. 물량 중심의 성장주의에 갇힌 교회가 내부 단속에만 몰두하다 벌인 자충수인 셈이며,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다가 결국 외부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려 들어오는 문까지 막아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날이 새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동이 트고 봄기운도 다가오듯이, 팬데믹 상황도 언젠가는 분명히 종식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교회가 재활성화되어 지금까지 안고 온 문제들을 새롭게 변화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함께 사회를 일궈가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신앙을 제시해, 잃어버린 신뢰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교회의 뜰 안에도 진정한 봄기운이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될 시대의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교회의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권혁인 목사는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소재한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의 담임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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