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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용의 제자가 본, 인간의 성정체성과 우리의 한계와 위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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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그리스도적 해체주의: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다.

임찬순 목사. 사진 제공, 임찬순 목사.임찬순 목사. 사진 제공, 임찬순 목사.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적 해체와 구성을 위한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도 로마인도 없다는 테제는 로마제국을 뒤엎을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 복음의 핵심 논리였는데, 그것은 근본개혁적인(Radical) 테제였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동성애 담론은 그리스도가, 그리고 바울이 로마제국을 향해서 외친 근본개혁적인 목소리를 담아내는 소리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에 기대서 가려는 또 하나의 정치적인 목소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환기시켰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으며, 다만 믿음을 통한 새로운 피조물이 있을 뿐이다. 이 그리스도적 해체주의를 근본개혁적으로 자기성찰과 회개의 길로 깊이 밀고 나갔어야 한다.

나는 연합감리교회가 분열의 길로 가는 것이 싫었다. 교단의 분열은 지금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지금의 현실도 괜찮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연합감리교회는 미국 교회사에서 24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노예제와 링컨 대통령의 공화주의에 대한 찬반을 통해서 북감리회와 남감리회가 분열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남북의 감리교회에 각각 속해서 활동했으며, 조선에서 연합의 길을 가장 먼저 걸었다. 연합감리교회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모든 교단이 그런 비극을 겪었다. 성결운동이 교단을 박차고 나간 건 아주 유명하다. 과연 인간의 성에 대한 담론이 교회를 분열시킬 수 있는 사안인가? 실지로 연합감리교회의 분열이 현실화하면서, 동성애 문제가 분열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 다만 피할 수 없는 분열을 격발시킨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는 현실적인 고백이기도 하다. 교단 분열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상과 침묵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이제라도, 우리는 관상과 침묵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길을 가야 했고, 지금이라도 그런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동성애를 향한 찬반 담론과 교단 분열이라는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 길을 걸어왔는지 다시 묻게 된다. 이번 사태는 우리 한인교회가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거나 새로워지는 계기가 되었는가? 인내와 기다림, 기도와 신앙, 포용과 자유를 향한 진솔한 태도와 자세를 유지했다면, 어떤 길이든 논란이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음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를 개혁하듯이 이 문제를 바라본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면서 걷는 길이 아니라, 세속적 운동과 다름없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었나 묻게 된다. 정의와 진보를 외치는 정치화한 운동이 아니라, 진정한 케노시스(κενοσις)를 향한 관상과 침묵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길을 택했어야 한다. 반대 운동이 아니라, 그런 운동을 매개로 새로운 영성과 기도 운동을 전개했어야 한다. 남녀의 몸의 성(性)이 아니라 마음의 거룩성의 성(聖), 자기의 마음을 돌아보는 성(省), 새로운 성 담론을 가열차게 전개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묻게 된다. 교단이 분열로 가든, 동성애를 인정하게 되든, 우리는 새로운 영성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의 길로 가기 위해 떨쳐 일어섰어야 한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 정의적 차원의 인권 문제에는 적극적으로 찬성해야 한다. 그러나 동성애를 모두 합법화하는 쪽으로 결혼을 정의하는 사안에는 유연하게 속도 조절을 했어야 한다. 그렇게 했다면, 쉽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는 동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물론 프로테스탄트지만,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에서 배웠어야 한다. 그들은 왜 저리도 전통을 고수하는 데 목숨을 걸려고 해왔는지를 정신만이라도 배웠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기도 운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계시적 언어에 대한 존중을 담는 새로운 신학 운동이어야 한다. 성경과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사모와 사랑을 택하는 내면 혁명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위에 것을 사모하고 신령한 젖을 먹기 위한 영성 운동이어야 한다. 지구촌적 기독교를 향한 깊이와 높이와 폭을 깊고, 높게, 그리고 넓게 하는 입체적 언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신학 운동이어야 한다. 동성애를 찬성하는 그룹이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자유를 신장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이와 같은 비중으로 보수주의적 사고를 가진 이들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존중도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어야 한다. 그것을 관상과 침묵의 기도의 길로써 표현하려는 것이다.

인간과 우주와 역사를 신의 관점에서 보는 근본개혁주의적 래디컬을 향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그것은 종말론적 결단의 세례를 위한 회개, 자기 죽음을 지향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 이 언명이 굉장히 신비롭게 내 속에서 되뇌어진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도 노예도 없고,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없다는 그리스도적 해체주의를 주장했다. 다만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창조적 구성을 외쳤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음양의 신비를 통한 성서적 해체주의, 그리스도적 해체주의의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됨은 육체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동성애를 주장하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일은 몸의 성을 논의하는 담론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울의 인간학에서 육체와 문자에 속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육체와 문자를 넘어서 영의 길, 생명의 길을 가야 한다. 몸성, 민족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성을 택한 예수와 바울의 영적 혁명을 이제는 완성하는 길을 가야 한다. 남녀의 성적 결정성을 넘어서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탈할 수 있지 않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이것은 신비의 길인가, 회피의 길인가, 아니면 비겁한 길인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는 여자이고 여자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정용이 제시한 융이언적인(Jungian) 깨달음이고 현대 모든 과학적인 언명을 창조적으로 인식하고 살아내는 실천의 길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결정론과 기반주의를 넘어서는 영성적 진술(Spirituality’s Statement)이다. 우주와 역사가 그렇다.  유위의 길을 배격하고 무위의 길을 가는 자연스러움의 길이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스스로 되어가는 길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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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부들은 자발적으로 결혼하지 않는 영성의 길을 걸어왔다.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 이런 길을 하나의 모델로 제시할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많은 사람의 모델이 되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이성애 인간에게 성생활을 끊고 유영모 선생이 간 길처럼 해혼(解婚)의 길로 가라고 하는 것이 보통의 모델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적 자기성에 대한 고백과 실천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먼저 택해야 한다. 그것이 세례의 정신이다. 자기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살 수 있다. 오히려 그런 다음에, 동성애자이든, 이성애자이든 자기의 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이들은 가톨릭의 신부와 수녀가 되는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를 존중하는 다양한 모델이 가능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수술로 트랜스젠더를 이루는 것도 쉬운 길은 아니지만,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내면세계와 영성을 가꾸는 본질을 추구하는 좁은 길을 택한다면, 오히려 대법원에서 법제화를 하거나 동성애자가 목사가 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게 된다. 나는 권력과 제도를 해체하는 길이 아니라 초탈하는, 그리스도적 해체주의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를 찬성하는 이들은 법제화가 되고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는 것이 결국은 새로운 도전의 길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법제화와 교단 안에서의 합법화가 그들에게는 승리의 정점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의 시작일 수도 있다. 신앙의 길은 정치적인 운동과는 다른 길이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반동의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길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지난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지 말고 자기를 변혁하는 래디컬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나 스스로 자연스러운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교단의 장정이 바뀐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장정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어 온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장정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화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또다시 현저히 욕보여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우리가 걸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깊은 호흡으로 기다리는 길을 가자. 결국 갈라섰는데, 드러나는 신선한 새싹은 보이지 않고 뭐 하러 이런 일을 벌였는가 하는 반성의 마음이 자꾸 우리들을 멈춰 세우고 있다. 그래도 주류 교단 가운데는 지금까지 기존의 장정과 전통을 고수해 온 수고를 무로 돌리고 손해의 길을 갈 필요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성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존중하고 포용하듯, 이제까지 성서의 언어를 붙들고 교회를 사랑하면서 신실하게 살아온 이들의 진정성도 훼손하지 않고 존중하는 좁은 길을 걸었어야 한다.

인간의 성(性)도, 성서의 문자도 우상화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따라가는 인간의 성(聖, 거룩함)을 지향해 가야 한다. 거룩함은 구별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처럼 말하고 왕처럼 듣는 길(聖: 王을 듣고(耳) 말하는(口) 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교회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언어와 신학적 담론을 가지고 새로운 영성의 꽃을 피워내야 하는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한인교회는, 감리교회는 위대한 교회였다. 우리는 베링해를 건너고 알류산 열도를 지나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선 고대 한국인의 후예로 태평양을 건너왔다. 우리는 미국 땅에서 태평양을 건넌 선교사들이 가졌던 제2 대각성 운동의 에너지의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우리는 나라를 잃고 종말론적 삶을 살며 새로운 나라를 세울 엄청난 에너지를 키워내는 독립운동을 했던 한민족의 후손이다. 이런 전통과 영적 에너지를 다시 살려내서, 한민족의 영성과 기도와 삶을 묶어서 이제 지구촌 기독교의 새로운 계시의 언어를 말해야 한다. 침묵하면서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자. 새날이 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토마스 오든(Thomas C. Oden) 교수의 마지막 유언이 떠오른다. 교단을 떠나고 싶은 유혹이 와도 떠나지 말고 안에서 싸우며 개혁을 이루라고 했다. 떠남은 결국 자기 패배의 길이고 희생하면서 교회를 세워온 신앙의 선배들의 희생을 배반하는 길이라고 하셨다. 결국에 요구되는 것은 마음의 변화가 아닐까? 그의 마지막 책은 [마음의 변화](A Change of Heart)였다.  


임찬순 목사는 서울대 철학과와 한국학 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에서 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벨기에 루뱅대학 연수 후, 미국 뉴저지 드루대학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M. Div.)과 박사(Ph. D)를 마쳤다. 현재는 텍사스중앙연회의 알링턴에 있는 언약교회(UMC of the Covenant)를 섬기고 있다. 임 목사는 재미 신학자 이정용 박사의 제자로 '정용리안'으로 불렸으며, 역서로 줄리아 칭의 <유교와 기독교>, 이정용의 <삼위일체의 동양적 사유>와 마지막 강의를 편집하고 소개하는 <역과 모퉁이의 신학>이 있고, 목회의 현장을 담담하게 담아낸 시집 <바람의 노래, 목자의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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