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와 윌리엄 선교 140주년 기념대회와 그 메아리

임찬순 목사. 사진 제공, 임찬순 목사.임찬순 목사. 사진, 필자 제공.

정희수 감독님이 이끄는 오하이오 감독구(동오하이오 연회와 서오하이오 연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메리와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 140주년 기념대회’가 8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렸다. 대회에 참가한 나는 지난 한 주를 감동 속에서 지냈다. 사흘 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배드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러 강연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이번 선교대회에서 메리와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실체였다.

감리교 최초인 어머니와 아들 선교사의 위대한 여정

이번 선교대회를 통해서 53세의 미망인으로 미지의 땅 조선에 온 메리 스크랜턴은 나에게 신앙의 영웅으로 우뚝 섰다. 성경에서 메리(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 모세의 누나로 하나님의 역사를 잉태하고, 낳고, 자라게 한 놀라운 여인으로 등장한다.

여러 논문 발표를 들으면서, 메리 스크랜턴은 나에게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민국을 잉태한 신앙의 여인으로 다가왔다.

메리 스크랜턴은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살다 남편과 사별하고 오하이오의 클리블랜드로 이주했다. 의사인 아들은 병원을 개업했고, 뉴잉글랜드의 전통 있는 감리교 가문 출신인 메리 스크랜턴과 그의 아들은 클리블랜드 제일감리교회 교인이 되었다. 그러다 메리 스크랜턴은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 의료와 교육 선교가 긴급히 요청되고, 갈 선교사가 없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부름에 온몸으로 반응한 메리 스크랜턴은 미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파송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막 결혼해 딸을 낳고 병원을 개업한 아들 윌리엄에게 조선으로 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자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윌리엄은 1884년 어머님과 함께 조선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긴 여정 끝에 1885년 조선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연회를 통해 1784년, 영국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서 독립한 교단이 된 미감리교회는 꼭 100년이 되는 해에 조선으로 가는 선교사들을 임명했고, 다음 해인 1885년에 선교사로 조선에 온 것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미감리교회 100년의 자식”인 것이다. 100년의 자녀로 난 일, 100년의 기도가 낳은 새로운 잉태라니 얼마나 귀한 일인가? 

메리가 얼마나 조선인을 사랑하고 품어주었는지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 헌신과 깊은 애정에 조선인들은 그녀를 대부인으로 불렀다. 그녀가 치료차 미국으로 안식년을 떠날 때, 수많은 이들이 모여서 눈물을 흘리며 그녀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

윌리엄은 양반과 권력자를 향한 선교가 아니라, 사대문 밖의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 즉 기층 민중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애고개에 지금의 아현교회 효시가 된 선한사마리아병원을 세웠고, 그가 세운 또 다른 교회 상동교회를 통해서는 독립운동가 전덕기 목사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를 길러냈다. 

숯장수 출신의 천민 전덕기는 메리와 윌리엄의 인격과 신앙과 사랑에 감동되어 예수님을 만났다. 천민이었던 그는 뛰어난 리더십과 신앙의 인격을 닦은 목사가 되어 상동교회를 이끌었고, 나라 잃은 백성들 가운데 뛰어난 이들을 모으고 나라의 일꾼으로 키웠다. 오래전 누군가가 대한민국은 상동교회가 세운 나라라고 말했던 것이 내 속에서 잠자다가 깨어났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는 조선인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하고 우호적이었고 한 번의 마찰도 없었지만, 친일적이고 조선인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 해리스 감독과 다른 선교사들의 제국주의적 선교 정책과 윌리엄의 현지 민중 중심적 선교 정책과 방향성 차이에 따른 갈등은 극에 달했고, 마침내 그는 선교사직을 버리고, 감리교를 떠나 성공회로 간 아픈 역사도 생각났다. 

윌리엄 스크랜턴에 의해 설립된 한국 감리교 역사의 중요한 교회 중 하나인 내리교회의 담임목사 김흥규 박사는 마침 ‘메리와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 140주년 기념대회’를 맞아 스크랜턴의 사역을 주제로 다루었다. 김 목사는 윌리엄 스크랜턴의 삶과 유산을 조명하며, 그를 단순히 ‘비극적인 엘리트 선교사'로 한정 짓지 않고 '민중의 선교사’이자 '가난한 일반 백성의 친구'로 재해석했다. 그는 또한 스크랜턴이 예수와 존 웨슬리의 본을 따라 사역했음을 강조하며, 그의 헌신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과 의미를 되새겼다.

메리와 윌리엄 선교사 모자(母子)는 기독교대한감리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파였다고 하면 과장일까?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는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해 조선의 여성에게 교육의 문을 열었을 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을 세워 여성 의료와 교육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한국의 여성과 이웃을 위해 헌신했다.

고령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조선 전역에 하나님 목소리를 전하는 데 헌신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1909년 10월 8일 새벽, 향년 77세의 나이로 소천해 양화진에 묻혔다. 선교사직 사임 후 윌리엄은 영국과 중국, 일본을 왕래하고, 일본 고베에서 조선인을 위해 일하다 그곳에 묻혔는데, 최근에야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올해 4월 오하이오 감독구 지도자들이 한국 방문 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의 스크랜턴 대부인 무덤 앞에 모자의 업적을 기리는 패를 세운 것도 감명이었다. 한인 감독과 오하이오가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 한국의 여성 지도자 대부분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김활란, 김옥길 등등이 오하이오주에 소재한 웨슬리안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도 놀랍다. 웨슬리안 대학에서 가까운 애즈베리 교회에는 김활란에게 헌금을 보내고 후원한 교인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발견했다. 연합감리교회 서오하이오 연회의 교회역사보존위원회(GCAH) 데이브 볼링(Dave Boling) 위원장은 오하이오주 웨슬리안 대학은 선교의 웨스트포인트로 불렸다고 말했다. 조선에서의 기독교 선교 역사와 오하이오의 깊은 인연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왔다.

선교대회 전 이정용의 자취를 찾아서

내가 학위논문을 썼고 지금도 계속 공부하는 이정용 목사의 발자취가 오하이오 곳곳에 있었다. 그는 털리도와 클리블랜드, 데이턴 등의 미국인 교회에서 목회했고, 콜럼버스 오터바인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이정용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오하이오를 둘러보고 싶었다.

8월 3일 주일 저녁 늦게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에 도착해서 홍인숙 감리사 댁에서 자고, 선교대회가 열리는 날인 8월 4일 아침에 출발했다. 거기서 콜럼버스까지 3시간여 걸려 노스브로드웨이 연합감리교회(North Broadway UMC)에 정오에 도착했다. 그 교회에서 이정용은 콜럼버스 한인 교회를 개척했다. 중북부 지역에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카고제일교회 다음으로 세워진 한인연합감리교회다. 이정용 목사는 1969년에서 1972년까지 그곳에서 목회했고, 노스다코타(North Dakota) 대학으로 떠났다.

아담한 교회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떠나려다가, 교회의 초인종을 눌렀다. “이 교회에서 한인 교회가 개척됐습니다. 그 흔적을 찾아보고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말하니, 교회 관계자분들이 그 교회 자료실을 뒤져 선교 회보를 들고 왔다. 

노스브로드웨이 연합감리교회(North Broadway UMC)의 역사 자료집에 기록된 이정용 목사의 사역.  이 목사는 1969년 이곳에서 콜럼버스 한인 교회를 개척했고, 1972년까지 목회했다. 사진 제공, 임찬순 목사.노스브로드웨이 연합감리교회(North Broadway UMC)의 역사 자료집에 기록된 이정용 목사의 사역.  이 목사는 1969년 이곳에서 콜럼버스 한인 교회를 개척했고, 1972년까지 목회했다. 사진 제공, 임찬순 목사.

그 책자를 펼쳐 살펴보는데, 이정용 목사가 당시 그 교회 담임목사인 스미스(Smith), 그리고 한국에 선교사로 다녀온 시드웰(Sidwell) 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와 얼마나 기쁘고 놀랐는지. 책자에는 그 교회가 6·25전쟁 때부터 한국의 고아를 지원해서 고아 중 한 명이 목사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실려 있었다.

이정용 목사가 노스다코타대학으로 떠난 다음 염필형 교수가 후임으로 부임했고, 세월이 지나 한인 교회는 그 교회에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건물을 사서 독립했고, 콜럼버스에서 가장 큰 한인 교회가 되었다.

이 박사가 보스턴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처음으로 가르친 오터바인 대학도 돌아보았다. 오터바인대학은 작은 대학인데, 주로 연합형제교단의 목회자 자녀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학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크게 성장해서 대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홍 감리사의 차를 타고 다시 2시간여를 달려 클리블랜드로 향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홍 감리사는 목회하면서 종종 부딪친 신앙과 실존의 문제들이 이정용 목사님의 책을 읽다 보니 시나브로 해결되었다고 한다. 신학은 자서전적이라는 테제가 내내 내 속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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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는 이 목사가 개렛신학교의 도서관 사서가 추천해서 받은 릴리파운데이션(Lily Foundation) 장학금으로 도서관학 석사를 공부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이 있는 곳이다. 그 시절 그가 목회한 오에헬로프 연합감리교회(Oeheloff UMC)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대도시 클리블랜드에서 낙후되고 어려운 슬럼 지역에서 목회하던 이정용 목사는 매일 거리로 나가 그 지역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 학생들로 인해 교회가 부흥되어 교회 옆에 있던 술집을 사서 교육관으로 개조해서 사용했다는데, 그 건물이 아직 교회 옆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곳에서 선교대회가 열리는 세이비어 연합감리교회(The Church of the Savior UMC)는 10여 분 거리다. 메리와 월리엄 스크랜턴 모자가 조선으로 가기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 목사가 목회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이정용은 메리와 월리엄의 선교의 열매로 이 땅에 온 것이다.

윌리엄은 인천과 강화도를 포함하는 지역의 감리사를 지냈는데, 정희수 감독은 자신이 강화도에서 뿌려진 윌리엄 선교사의 열매라고 고백했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영적 동역이 곳곳에서 역할하고 있다는 생각이 뜨겁게 다가왔다.

선교대회를 마치고 찾아간 앨런과 외링거의 무덤

사흘간의 대회가 수요일 폐회 예배로 끝났다. 점심 도시락을 챙겨서 먹고 작별한 후, 털리도(Toledo)를 향해 떠났다. 장로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조선에 온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과 중국에서 16년을 선교한 후 조선에 합류한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 선교사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다. 연합감리교회 서오하이오 연회의 교회역사보존위원회(GCAH) 위원장인 데이브 볼링과 정 감독님, 그리고 인천 내리교회 김흥규 목사님의 여정에 동행하는 호사를 누린 것이다.

프랜시스 애즈베리 감독의 전도를 받아 회심한 오하이오 초기 감리교도의 5대손인 볼링 위원장은 우드론 공동묘지(Woodlawn Cemetery)의 앨런과 올링거가 묻힌 곳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150여 년 전 무명의 나라 조선으로 가,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영면한 두 영웅은 오하이오를 거룩하게 만들고 있었다. 

볼링 위원장은 메리와 윌리엄 시대의 오하이오의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때는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산업혁명을 거치며 크게 도약하던 시기였다. 에디슨과 라이트 형제로 대변되는 희망과 변화의 시기에 복음을 들고 땅끝으로 간 이들이 바로 메리와 윌리엄이었다.

오하이오는 선교 영웅들이 묻힌 거룩한 땅이다. 그들은 갔으나 그들의 역사와 복음은 살아 있기에, 그들은 아주 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것도, 박정찬 감독님이 폐회예배 설교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이 전한 복음과 사랑 때문이다. 그들은 오늘 우리 속에 부활하여 복음과 사랑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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