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로, 영화 <센티멘탈 밸류>에 대한 현혜원 목사의 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족'이 가지는 센티멘탈 밸류
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며칠 전 여동생이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이 보고 싶다고 해서 창고에서 앨범을 모아둔 박스를 꺼냈습니다. 먼지를 털고 박스를 여니, 그 안에는 어린 시절 앨범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이역만리 이곳까지 굳이 들고 온 부모님 유품도 있었습니다. 어떤 유품은 정겨운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미소를 머금게 했지만, 어떤 유품은 미처 아물지 못한 채 봉인된 오랜 상처를 다시 헤집기도 했습니다. 결국 저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사진 한 장을 버리는 것으로, 그 기억과 작별하기로 했습니다.
영화의 제목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는 '남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즉 정서적 가치를 품은 사물을 뜻합니다. 그러나 센티멘탈 밸류를 가진 모든 물건이 같은 무게의 의미를 지닐까요. 어떤 물건은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기도, 어떤 물건은 차가운 통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노르웨이 요아킴 트리에(Joachim Trier) 감독의 영화 <센티멘탈 밸류>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영화는 내내 단조롭고, 때로 물속에서 바깥의 대화를 듣는 듯한 이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단절되어 있고, 영화가 관객에게 건네는 언어도 뚝뚝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가족 간의 단절을 이야기하기 위해 감독은 일부러 그런 대화법을 사용한 것일까요?
노라와 아그네스의 부모는 그녀들이 어릴 때 이혼합니다.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는 자식들을 오랫동안 만나지 않습니다. 어린 두 딸은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를 보살피며 서로를 의지하며 자라납니다. 부재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신들을 방임한 어머니를 돌보며 자란 두 딸에게 그 시간은 아린 상처로 남습니다. 마치 그녀들이 성장한 아름다운 집에 깊고 길게 드리워진 벽의 균열처럼요.
이 영화에서 그들의 집은 가족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연결점이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 구스타브가 떠난 후 두 딸은 어머니와 함께 구스타브가 나고 자란 집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한 가족이 대를 이어 100년 넘게 한 집에서 산 것이죠. 집은 아름답지만, 지어질 때부터 균형에 문제가 있었고,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뒤틀린 균형은 벽과 구조에 위험한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마치 구스타브의 어머니에서 시작되어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의 상처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영화에서 집은 로케이션에 불과한 구조물을 넘어서 시대의 목격자이자 내레이터로 작동하지요.
어머니의 장례식 날 노라와 아그네스는 집에서 손님들을 맞이합니다. 어릴 적 심리상담사였던 어머니가 내담자와 나누던 대화를 엿듣곤 하던 2층의 굴뚝을 통해서 노라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손님들과 대화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가 장례식에 참석한 것입니다. 당황하는 노라와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아그네스. 알고 보니 아버지와 평소 연락을 하고 지낸 아그네스가 아버지에게 장례식 소식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두 딸을 두고 갑자기 사라졌던 아버지는 다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딸들의 삶으로 들어옵니다. 노라는 그런 아버지가 달갑지 않습니다.
노르웨이의 명장 감독인 아버지는 난데없이 나타나 영화 대본을 들이밀며 딸에게 출연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노라는 두 번 생각도 할 것 없이 단칼에, 거칠게 거절합니다. 더군다나 대본은 아버지 구스타브가 일곱 살 때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자살한 할머니 카린에 대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살한 어머니 역할을 오랫동안 보지도 않고 지낸 맏딸에게 맡아주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그리고 자신과 두 딸이 나고 자란 바로 그 집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사과도, 미안함도 없이, 마치 진흙투성이 신발로 발자국을 내며 들어오는 아버지. 어릴 때 잃어버린, 두 딸의 삶에서 일방적으로 사라진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 자신의 자살한 어머니 역할을 맡아달라고 요구하다니, 노라의 입장에서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법한 재회입니다. 둘은 결국 크게 싸우고 맙니다.
노라는 같은 집에서 나고 자랐지만 왜인지 동생 아그네스보다 많은 부분에서 결핍된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일찍 결혼해서 사랑하는 남편과 귀여운 아들을 두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아그네스와 달리, 노라는 매번 사랑할 수 없는 남자와만 연애하고 그 관계마저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외로워하지만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듯 보입니다.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연극배우이지만 매번 첫 연극을 올릴 때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 무대에 쉽게 오르지 못합니다. 숨을 쉬지 못해 입고 있던 코르셋을 찢어버리거나 극장 바깥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스태프에게 잡혀 오곤 합니다. 그러나 강제로 밀려 올라간 무대에서는 박수갈채를 받는 완벽한 무대를 선보입니다. 연애도 연기도, 감정을 쏟아내어야 하기에 그녀에게는 공포스럽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정작 그녀에게는 탁월한 재능이 있음에도 말입니다.
영화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의 한 장면. 사진 출처, 씨네 21. 노라가 아그네스에게,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왜 너는 멀쩡하고 나는 이렇게 망가졌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꼽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그네스는 담담하게, 마치 자신은 오래전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언니가 있었어."
이혼 후 우울증으로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 엄마를 대신해 노라는 여동생의 머리를 감기고, 묶어주었습니다. 손을 잡고 학교에 보냈습니다. 언니가 있어서, 아그네스는 불안이나 결핍으로 훼손되지 않은 채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그네스가 여전히 아버지를 삶에 받아들이고, 다른 이를 믿고 사랑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건 언니 노라의 사랑과 돌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가족은 상처를 남기기도, 사랑으로 치유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그들의 집과 똑같은 세트장에서 할머니 카린이 자살하는 모습을 노라가 연기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끝을 맺습니다. 결국 노라는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하고, 일곱 살 아버지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 할머니 카린의 자살 장면을 재연하고, 아그네스의 아들은 일곱 살 할아버지 구스타브의 모습을 연기함으로써 세 세대에 걸쳐 드리워진 오랜 트라우마를 새롭게 해석해 낼 가능성을 열어 보입니다. 할머니 카린의 자살은 어린 구스타브의 영혼에 깊은 상실과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다시 아내와의 불화로, 그리고 어린 노라와 아그네스의 삶에 깊은 상처를 냅니다. 그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던 부녀는 결국 상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지만, 다시는 그 삶을 무작정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자신들의 집이 아닌 세트장—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공간—에서 그 장면을 재현해 냅니다.
나치에게 받은 참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어린 아들을 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 카린을 연기하며 노라는 또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일흔이 넘은 구스타브는 일곱 살 자신의 모습을 연기하는 아그네스의 아들, 자신의 손자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죽음을 택한 어머니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연기하는 제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그네스는 아마도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새롭게 조우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 셋은 서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여전히 사랑보다는 애증에 가깝고, 이해보다는 인내에 가까운 감정이겠지만, 구스타브와 노라, 아그네스는 비로소 한자리에서 어색하나마 함께 웃음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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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하룻밤에 말끔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몇십 년을 곯은 상처라면 아무는 데에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주 미세한 사랑의 가능성만으로도, 가족이 함께 머무는 공간의 온도는 조금씩 올라갑니다. 영화 속 그 어색한 웃음이, 보는 이에게 그 온기를 조용히 전해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그 집'이 있습니다. 균열이 간 벽, 차마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끝내 떠나지 못하는 어떤 자리. 영화가 끝나고 저는 제 안의 그 집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가 그 집을 완전히 허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새로운 문 하나쯤은 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구스타브와 노라가 자신들의 집이 아닌 세트장에서 그 장면을 다시 찍었듯이 말입니다.
이 영화는 제 여동생이 추천해 줘서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노라와 아그네스가 나누는 "나는 언니가 있었어"라는 대사가 세상의 많은 자매들이 공감하는 이야기라는 어떤 글을 읽고, 동생이 저에게 같이 보자고 권한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본 뒤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가족을 관통하며 대를 이어 내려온 트라우마, 그것이 저와 동생에게 남긴 상처,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상처를 견뎌내며 서로를 치유해 왔는지에 대해서요. 가족이 남긴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을 어떻게 품고 살아갈지는 결국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 몫을 감당해 내는 일이야말로 가장 값진 센티멘탈 밸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레너드 코헨의 1992년 앨범 The Future에 수록된 명곡 'Anthem'은 "모든 것에는 균열의 틈이 있고, 그리로 빛이 들어온다(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라며 좌절 속에서도 희망과 연대를 노래하며, 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삶의 실존적 한계를 수용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코헨의 말처럼 우리의 ‘집’이, ‘관계’가, ‘기억’이 드러내는 균열의 틈을 통해 빛이 들어오기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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