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목사, 사진, 필자 제공최근 마태복음 25장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민주당 라파엘 워녹(Raphael Warnock) 상원의원과 공화당 마이크 존슨(Mike Johnson) 하원의장의 논쟁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워녹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난한 사람과 이민자를 위한 정부 정책에 적극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존슨은 마태복음 25장은 그리스도인 개인이 새겨야 할 말씀이지, 연방정부 정책의 청사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논쟁을 보면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그 가치의 구현 과정을 다시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려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날의 공적인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두고는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실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어느 한 정치적 입장만이 성경적 입장이라고 단정하는 주장에 대해 늘 경계하게 만듭니다.
오랫동안 연합감리교회는 매우 깊은 신학적·윤리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양쪽 모두 자신들이 성경적 신앙의 본류를 지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과정에서 배운 가장 슬픈 교훈 가운데 하나는,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기만 하면 교회가 곧바로 건강해질 것이라고 너무 쉽게 믿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진보적인 그룹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더 큰 정의와 포용을 위해 교단의 감독과 통제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반면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교단의 개교회에 대한 통제로 보고, 자신들의 양심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신학적 입장을 강요하는 것으로 경험했습니다. 누구의 입장에서 보든 결과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는 점점 신학적 확신(theological conviction)과 제도적 강제(institutional coercion)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사람의 마음이 변화해야만 해결될 문제를 교단의 제도와 행정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의로움이 제도적 권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단이든 정부든 충분한 권력을 가지기만 하면 우리가 꿈꾸는 교회와 사회를 상에 실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제도와 신앙 사이의 긴장과 갈등의 해결은 어느 한쪽의 힘이 세질 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제도는 중요합니다. 제도는 질서를 세우고, 약자를 보호하며, 책임을 묻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제도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랑을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회개를 대신할 수도, 성령님의 변화시키시는 역사를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고 명령하십니다. 나그네를 환대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며, 긍휼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명령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질문은 이러한 성경의 명령을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의 공공정책으로 어떻게 구현할지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 옳은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정치의 영역에서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그 선을 가장 지혜롭게 실현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 둘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논쟁은 사랑과 긍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진 겁니다. 가정인가 교회인가? 민간 자선단체인가 지역사회인가? 주정부인가 아니면 연방정부인가? 사실 어느 한 곳이 아니라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마땅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어디에 무게를 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정치권 양쪽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커질수록 더 큰 사랑과 긍휼히 실현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정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저 역시 교육과 의료, 그리고 가정과 지역사회를 세우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부의 지출이 곧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닙니다.
목회하면서 저는 수많은 사람의 삶이 따뜻한 나눔과 도움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선한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보았습니다. 복지제도의 관료화의 맹점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산은 낭비될 수 있습니다. 복지혜택은 악용되기도 합니다. 정작 꼭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재정이 비효율과 부정 사용으로 새어 나가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우리가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보수 진영 역시 똑같이 심각한 유혹에 처합니다. 재정 건전성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도움받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마음속에 자리 잡기 쉽습니다.
창세기부터 성경은 노동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 질서의 일부로 소개합니다. 일은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닙니다. 일은 삶에 목적을 줍니다. 책임감을 길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돌보시는 일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도록 합니다.
그렇기에 건강한 사회복지 정책은 반드시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첫째,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낌없는 도움을 제공해야 합니다. 둘째, 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다시 일하고, 사회에 기여하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세워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회복이 가능한 사람에게 의존적인 삶을 계속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사랑이며, 가장 존엄한 복지입니다.
웨슬리는 개인의 경건과 사회적 책임을 절대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감옥을 찾아 죄수들을 돌보았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료 사역을 시작했으며,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 사역에도 앞장섰습니다. 그의 긍휼은 결코 말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웨슬리는 긍휼히 단순히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근면을 가르쳤고, 정직한 노동을 강조했으며, 절약과 교육, 그리고 책임 있는 청지기 정신을 끊임없이 설교했습니다. 웨슬리의 삶 속에서는 긍휼과 책임이 언제나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웨슬리의 정신이 그 어떤 정치 구호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길을 제시한다고 믿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사회는 복음의 심장을 잃어버린 사회입니다. 동시에 사람들을 영원한 의존 속에 머물게 하는 사회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고통을 덜어주는 데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존엄과 기쁨을 회복하도록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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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언제나 하나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서로 긴장하는 가치들을 함께 붙들라고 요구합니다. 워녹이 속한 민주당은 분배의 정의를 강조하고, 존슨이 속한 공화당은 책임, 자립, 자유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양쪽 모두 성경의 중요한 가치를 붙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 가치가 다른 가치를 압도할 때입니다. 긍휼 없는 책임은 냉혹해지고, 책임 없는 긍휼은 의존을 초래합니다. 복음은 긍휼과 책임을 함께 요구합니다. 웨슬리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길은 먼저 거듭난 사람을 세우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말한 '사회적 성화(Social Holiness)'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교회는 정치적 진보의 의제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보수의 의제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언제나 양쪽 모두를 향해 말씀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동시에 제도와 권력에 지나친 희망을 거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도전합니다. 어떤 정당도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민주주의를 하나님의 일반은총(Common Grace) 가운데 하나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로 인해 불완전한 세상에서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끊임없이 일깨워줍니다. 어느 정당도, 어느 정치 이념도, 어느 교단도, 그리고 어느 신학 전통도 완전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주님을 고백하고, 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공공정책과 정치적 판단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겸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신앙적 확신을 가지고 공적 삶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음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념은 담대하게 말하되, 동일한 성경을 사랑하며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존중과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은 또 하나의 정치적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정치인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정부를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교회가 진리와 은혜를 함께 품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긍휼을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신실하게 관리하는 청지기의 책임을 다하고, 정의를 사랑하되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지만, 우리의 정치적 판단은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겸손한 공동체, 그러한 교회야말로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교회가 아닐까요?
제도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제도를 바꿉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자가 세워질 때 사회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를 만들지 못한 채 제도만 바꾸려 한다면 교회도 결국 또 다른 권력투쟁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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