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교개혁의 뒤안길
앞서, 루터교 예배에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술에 취해 있거나 설교 내내 잠을 잤다고 했는데, 칼뱅의 제네바 교회는 어떠했을까?
당시 제네바에서는 주일 아침 예배 참석은 물론 주중 집회 설교가 있다면, 그곳에도 참석해야 한다고 법률로 규정되어 있었다. 또 교회에 지각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고, 성직자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것도 투옥의 대상이 되었으며, 의복의 색이나 양뿐만 아니라 식사에 사용하는 접시의 수도 제한하는 법률이 있었다.
당연히 카드놀이와 같은 도박이나 술집에 자주 출입하는 것, 외설적이거나 반종교적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금지되었고, 옷을 천박하게 입는 것도 법률 위반에 해당되었다. 부덕한 길이의 머리를 가진 여성들은 감옥에 갔고, 자녀들의 이름은 신구약에 나오는 인물들로 지어야 했다. 음행(Fornication)은 사례에 따라, 추방 또는 익사형을 당했고, 간음(Adultery)은 원칙적으로 사형이었다. 칼뱅의 의붓딸과 사위가 이 혐의로 처형당했고, 칼뱅의 동사목사 3인도 간음 혐의로 그 직을 떠나야만 했다. 신성모독과 우상숭배 역시 사형에 처했다.
이처럼 강력한 규율로 인해, 지금도 상 피에르 성당의 스테인드그라스 외에는 성당의 길 건너편에 있는 제네바 자연사 박물관에 그때 당시 떼어놓았던 각종 조각품과 장식용 예술품이 별도 표기로 전시되어 있는 정도의 기물(器物)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잉글랜드의 경우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는 일치령을 내려, 성공회 기도서와 성례문집에 따라 모든 예전을 집전하도록 명령했고, 이 책을 우습게 여기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벌금형이나 투옥형을 내리도록 했다. 교회 출석은 당연히 법으로 정해졌고, 기독교를 넘어선 신앙의 자유는 금지되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도움으로 얻게 된 교회의 영향력은 추후 유럽교회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회적 편견과 억압에 저항하던 침례교회나 메노나이트교(Mennonite) 분파인 아미쉬(Amish) 공동체 등 민중의 정서를 반영한 종교가 국가교회들의 억압에 저항하며 생겨났으며,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몰락 이후 더 잔인해진 박해를 피하고자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또 신대륙으로 탈출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재세례파(Wiedertaufer) 운동이 침례를 주장한 것은 맞지만, 이는 종교개혁으로 일어난 농민전쟁과 지주들에게 신분상 억압을 당했던 일용직 농부들이나 신기료 장사 및 빵 굽는 이들이나 푸줏간 하녀들이 민심을 훑고 있던 침례교의 집단행동에 동조하여 수난을 당했던 결과 생겨났다는 점이다.
네덜란드의 메논이라는 신부가 주도하여 시작한 메노나이트나 리몬스트란트형제단(the Remonstrant Brotherhood)의 경우도 이와 다를 바가 없을 뿐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들의 종교성을 담보하는 이들의 공동체 교회 운동 역시 국가교회의 오밀조밀한 조직망에서 벗어난 자유 시민의 새 공동체였다.
무엇보다 이들은 하나같이 마을공동체를 기간 조직으로 삼아 혈연공동체에 더하는 신앙조직으로 성장하였으며, 조직의 내부에는 장로와 조직을 대표하는 감독 있었고, 아미쉬와 같은 평신도 공동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일상을 파고드는 신앙 정신과 조직 활동은 형제단으로 발전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개척하고 세웠던 투르카이/터키(Thurkkai)의 초대교회들이 기독교의 성직 세습과 외세에 밀려 지금은 이슬람 지역이 되어버린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또 카파도키아 3교부(Cappadocian Three Fathers)들도 그렇지만, 아시아 교회의 영성이 끝내 수피(Supi)의 이맘(Imām, 영적 지도자) 하나를 이겨내지 못했다. 루스트라와 이고니온에서 나온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수피이즘의 메카가 되어버린 콘야를 바라보면 가슴이 아프다.
이슬람 세력에게 투르카이와 아시아 교회를 상실한 것을 단순하게 한마디로 정리할 순 없지만, 나는 초대교회의 성직 계급의 해악으로 민중에게서 버림받은 기독교가 이슬람 세력에게 밀려났고, 민중의 종교적 배반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성직자의 타락과 세습의 폐해는 오늘날 논의되는 제3의 종교개혁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권에 얽매인 성직의 세습화, 건물 기독교의 횡포와 종교계급의 일탈이 그러한 조건을 더욱 충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상황이 제3의 종교개혁을 부르고 있다고 믿는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국가교회의 건설이었고, 17세기의 종교개혁이 경건주의로 선회했다면, 18세기의 종교개혁은 개혁 사상을 교회에 재현하려던 존 웨슬리의 복음 부흥운동이었다.
웨슬리는 그 시대 산업혁명의 군중들을 복음으로 무장시키고, 경건주의 감리교도로서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그의 복음운동에서 파생된 성결운동과 구세군의 봉사운동은 19세기 세계복음화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1907년 아주사 부흥 운동은 유색 인종들의 복음 잔치가 아니라, 카시 힐의 부흥 운동과 웨일즈 대부흥 운동에 이어 평양의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지며 지구촌 전체를 감아 도는 오순절성령은사주의 운동이었다. 특히 로잔느 복음운동으로 등장한 세계복음주의 운동은 현재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에서 방언 은사와 치유 은사를 통해 번영의 복음으로 가시화되었고, 지구촌을 휘감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름 부음의 역사와 초대교회의 역사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러면 2022년 현실은 어떠한가? 제3의 종교개혁은 가능한가?
지난 2월 24일 건국한 지 30년이 지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로 인해, 전 세계가 온통 전쟁의 위협에 직면한 채, 성경에서 말하는 곡과 마곡의 전쟁이 아닌가 싶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이슬람 대치 국면에서 범죄자 취급을 당하면서 전전긍긍하던 이슬람은 인접국에 무상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 기독교를 압도하는 전략적이고 공격적인 선교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과 상당 부분 닮아 있는 한국 교회는 교파 간 연대보다 개교회주의로 무장하고 자생해 왔으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타교파의 교회나 지도자와는 무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물론 교경 협의회나 지역별, 권역별 기독교 연합회가 존재하지만, 교회의 상당 부분이 해당지역사회의 복지서비스에 준하고, 긴급구호 사업에 치중하여, 조직상 관변단체에 불과한 이들의 경쟁력 없는 조직력으로는 공개된 일부 행사나 치를 뿐 역동적인 일들은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다.
다만 지금 한국교회에서 소망스러운 것은 제도권 교회들이 보여주는 행보에 비해, 지역주민들과 호흡을 맞추고 민심을 흡수하여 기층민들의 요구에 답하려는 동네목회를 조직하고, 공동체 기간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대안적 개혁운동을 이끌고 있는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의 회중주의 신앙이 성직 계급의 독주를 완화시키고, 탄소제로(carbon zero) 운동같은 환경 생태 평화운동과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계기로 시작된 메노나이트같이 기독교평화운동에 활성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운동의 대중성이 기존의 개혁운동에 비해 떨어진다고 해도, 남다른 운동의 진정성과 열정 그리고 비전에 대한 추진력은 고유한 개혁운동의 영역을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교권주의를 극복하고 민중들의 정서를 품은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보이는 제3의 종교개혁의 다른 모습은 아닌가 싶다.
사족을 달자면, 나는 제3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나의 개혁이 일치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종교개혁은 구조악의 개선, 구조적 개혁뿐만 아니라 나의 개혁, 나의 변화, 나의 삶의 실천으로 평화와 생명을 담보하는 운동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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