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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을 다시 생각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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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

(편집자 :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아 많은 사람이 정치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기에 "연합감리교회와 정치"시리즈에 이어 김선중 목사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독교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역사에 관련한 내용이 담긴 글을 2부에 걸쳐 소개하려고 한다. 이글은 시리즈의 번째로 성서적 관점에서 미국에서의 삶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에 대한 이야기다.)

3. 적용

위에서 말한 역사적인 배경을 되새기며, 필자가 사는 이 미국 사회에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가지를 다시 점검해 보려 한다.

첫 번째는 이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위해, 먼저 세속화(secularization)와 세속주의(secularism)라는 용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세속화는 자신의 세속성(secularity)을 신권정체(theocracy)로부터 독립 시켜 자신의 성숙과 자율성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반면, 세속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 세속성을  절대화하는 입장이다.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는 세속화를 “기독교의 정신사적-사회사적 승리”라고 했고, 프리드리히 고갈텐(Friedrich Gogarten)은 “역사에 대해 성서적인 신앙이 끼친 영향의 당연한 결과”로 여기는 등 세속화에 대한 신학자들의 진술은 상당히 적극적이다. 심지어 하비 콕스(Harvey Cox)는 세속화의 의미를 성서적인 사건들 속에서 찾으며, 창조를 “자연의 비신비화”, 출애굽을 “정치의 비신성화,” 시내산 언약을 “가치의 비성별화”로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의 세속성을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거나 혹은 이 세상 안에서 맹목적으로 살아갈 위험이 있다.

미국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따른다. 하지만 나름의 자율성과 이념으로 성숙해야 할 이 사회의 현실은 그렇게 성숙하지 못하다.

몇 달 전,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외부 간판에 누군가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BLM”이라고 써 놓았다. 나름 사회적인 이슈에 민감하게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하고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그 글씨를 보고 나니, 이 사회의 차별, 특히 인종차별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어 왔는지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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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자부하는 신앙인들도 그 불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오래전 어느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이다.

백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에 파송 받아 갔는데, 교파를 초월하여 다른 인종의 목사가 온 것은 필자가 처음이었다. 열성을 다해 목회했기에 교회 안팎으로 좋은 평판을 누리고 있었는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분이 “자신이 한국전쟁에서 한국인을 겪어봐서 아는데, 절대로 한국인을 믿지 말라.”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필자가 섬기던 교회에 출석은 하지 않았지만, 그 교회에 적을 갖고 있던 분이었기에 씁쓸한 마음은 금할 수가 없었다.

미국 사회에서의 현실적인 문제 하나는 “백인의 특권”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개개인의 인격이나 도덕성과 상관없이 시스템을 통해 조직적으로 학습되는 것이다. 모든 중심에 백인을 놓고 다른 인종의 사람들은 침묵시키면서 백인들에게 더 큰 영향력과 권력 그리고 자원을 제공하여 일상적으로 그 힘을 발휘하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분명하게 직시하여, 프랜시스 켄댈(Frances Kendall)의 말처럼, 이것이 단지 특정 그룹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사회적 구성물(construct)임을 밝히고 무효화시켜야 한다. 제니퍼 하비(Jennifer Harvey)의 말처럼 소수 인종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 시스템을 겨냥하지 않고, 인종 간의 화해만을 말하는 것은 현실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두 번째는, 이렇게 왜곡된 미국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신학”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현상(status quo)을 인가하여 그 사회의 가치를 섬기는 그런 정치신학 말고,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밝히며 세상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함으로써 세상의 변혁을 추구하는 그런 정치신학 말이다.

요하네스 메츠(Johannes Metz)에 따르면, 계몽주의 이후로 형성된 중산층 시민계급(부르주아)은 오늘날의 이성적이고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인간상의 배경이 되었지만, 부르주아 종교를 형성함으로 사회에 대해 무비판적이고 비실천적인 신앙생활의 형식을 계승시켰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오직 동등하게 교환할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을 상대하는 그들만의 교환원리가 “사사화(privatization)"의 방식으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나누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 평화, 정의, 화해, 사랑, 회심, 제자직 등의 성서적 가치는 그렇게 사사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신앙도 본래 공적이고 정치적인 변혁이라는 메시아적인 차원을 갖는 것이어서, 교회 역시도 사회를 비판하고 변혁하고 해방시키는 과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 이후 성서적 가치들은 그 본래의 성격을 잃고 사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으로 축소되었고, 이에 따라, 교회 역시 중산층 시민계급의 문화적 요구만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이 사회에서 겪는 차별에 대해 신앙인들이 무감각해지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차별을 행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보통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앞두고 스터디 그룹들을 조직해 미리 열심히 공부한다. 어느 날, 어느 미국인 학생이 다가와 필자의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한다. 처음 와서 말도 서툴러 보이니 도와주고 싶었나 보다. 자기가 속한 그룹이 요약정리한 자료가 있는데 필자에게 주겠다고 한다. 한국에서 그 분야를 전공했기에, 그들의 자료가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사양하다가 그 마음이 고마워 받았다. 시험이 끝나고 그 학생을 교정에서 마주쳤고, 도움을 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런데 순진하게 그 시험의 점수를 말하고 나니 갑자기 그 친구의 얼굴빛이 달라지더니 그 이후에는 인사를 해도 외면하고 지나간다.

그 경험을 통해 필자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깊이 생각해보았다.

상대방이 자신의 그늘 밑에 들어와 있고, 베풀고 받는 우열관계가 존속되는 상대방에게는 “사랑”을 베풀 수 있지만, 상대방이 그 예상을 벗어나는 무게의 존재로 다가올 때는 멈추게 되는 사랑은 타인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열면서 손해를 감수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온정주의 혹은 식민주의의 관점에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해 놓고 오직 잉여품(surplus)만을 내어주는 생색내기일 뿐이다.

성서의 메시아적인 사랑을 설명하면서 메츠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주의적인 사유로 가득한 시대에 기독교적 사랑은 민족주의에 불명예를 가져온다는 혐의를 떠맡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인종차별주의와 천인공노할 사회적 대립각을 세우는 이 시대에 기독교적 사랑은 인종반역(Rassenverrat)의 혐의와 유산계급(Besitzenden)의 절대적인 이익을 거스르는 계급반역(Klassenverrat)의 혐의도 짊어질 것이다.”

예수도 당시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반역자로 처형당했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도 기독교의 메시아적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메츠는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기억, 이야기, 연대성”이라는 방안을 제시한다.

기억과 이야기는 연대성과 연결되어야 실천할 수 있고, 연대성은 기억과 이야기가 함께 있어야 인식되는 상관관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 고통스러우나 해방적인 힘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며, 교환할 가치가 없는 사회의 가장 작은 자들, 소외된 자들, 변방에 있는 자들, 가난한 자들, 억압과 차별을 당하는 자들과도 연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선교에 힘쓰며,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실천의 길일 것이다.

사도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그레데 (크레타섬)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딛 1:5). 이 사회에서 이민자로 남아 살아가는 이유는 이 사회의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그 일을 위해 참된 신앙인들을 세워 연대하도록 함이 아닐까 한다.  

이 사회는 모든 인종이 그 가치를 존중받으며,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할 소중한 장소이자 변혁과 구원을 이뤄야 할 장소이다. 특별히 신앙인이 그렇게 만들 책임이 있고, 필자 역시 비록 취약한 이민자로 살아가지만 그러한 일에 함께할 사명이 있다.

투표는 그 사명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존 웨슬리는 1774년 10월 6일 자 그의 일기에서 선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가 없이 가장 가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하고, 반대하는 후보에게 악한 말을 하지 말고, 반대하는 후보에게 투표한 이들에게 격해지지 않도록 영혼을 잘 돌보라.”

웨슬리의 권고는 투표행위에도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깊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처음에 언급했던 영화 셀마의 주제가 글로리의 외침이 새로운 무게로 울려난다.

“우리는 노래한다, 피가 흘러나오는 베인 상처를 우리의 음악으로 삼아... 이제 우리는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고 있다. 그 어떤 이도 개인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우리에겐 어른의 지혜와 젊은이의 활기가 모두 필요하다. 우리가 승리라고 부르는 이야기에 참여한 것을 환영한다. 주께서 임하시매 나의 눈으로 그 영광을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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