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로, 영화 “플라워 킬링 문”에 대한 현혜원 목사의 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원주민 오세이지족(The Osage Tribe)은 1920년대에 전미에서 가장 부유했던 사람들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오랜 시간 캔자스에 터를 잡고 살아온 이들은 1870년대 미국 정부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오클라호마로 떠밀려 갑니다. 그런데 1897년 그 척박한 땅 오클라호마에서 ‘검은 금’ 석유가 터져 나옵니다.
순식간에 거대한 부를 얻은 원주민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그들을 ‘야만인’이라 무시하던 백인을 하인과 기사로 부립니다.
미국이 서쪽으로 영역을 넓혀가던 20세기 초 오클라호마는 ‘서부로, 서부로’를 외치며 나아가던 개척자들의 길 위에 있던 땅이었습니다. 당시 서부로 몰려가던 이들은 대개 경제적, 사회적 지위와 학력이 낮은 백인 이민자들이었고, 서부 개척지는 치안 부재와 대공황이 맞물려 광란의 시절을 겪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발로 차는 것이 더 유죄를 받기 쉬운” 시대의 한가운데 미국 원주민이자 가장 부유한 사람들인 오세이지족이 있었습니다.
80세를 넘긴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The Killer of the Flower Moon)>은 3시간 2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을 만큼 강렬합니다. 영화 중반부터 저는 “슬프다··· 슬퍼”라고 중얼거리며 영화를 보아야 했습니다. 다큐드라마(다큐멘터리+드라마)로 보일 만큼 건조한 내레이션에도 오세이지족의 ‘한’은 그 건조함을 비집고 터져 나옵니다. 데이비드 그랜의 2017년 베스트셀러 논픽션 <플라워 문: 거대한 부패와 비열한 폭력 그리고 FBI의 탄생>을 원작으로 하는데, 원작과 달리 영화는 FBI의 탄생보다는 오일머니를 두고 벌어지는 비극적 개인사에 집중합니다.
영화는 여러 장면을 통해 온갖 방식으로 살해당하는 오세이지족 사람들을 조명합니다. 대공황 기간 금지되었으나 여전히 암암리에 유통되던 밀주 탓에 알코올중독에 빠져 죽어가는 원주민, 오일머니로 인해 대낮에 공공연하게 살해당하는 원주민들, 백인들의 음식인 달콤한 케이크와 사탕으로 인해 당뇨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원주민. 그 와중에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타 가는 당뇨병 약에, 그들이 마시는 밀주에 독을 넣습니다. 시간과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결과는 동일합니다. 백인의 탐욕이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196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타인종 간의 결혼은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버지니아에 살던 흑인 아내 밀드레드 러빙과 백인 남편 리처드 러빙은 흑인과 백인이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상위 법원에 해당법을 제소했고, 결국 1967년 타인종 간 결혼 금지법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과 함께 그해 금지법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죠, 1920년대 오클라호마는 타인종 간 결혼이 눈에 띌 만큼 흔합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백인 남자와 원주민 여자의 결합만 보입니다.
영화는 그 이유를 쉽게 설명해 줍니다.
오일머니를 가진 원주민 여자와 결혼한 백인 남자는 여자가 죽은 후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던 원주민 여자는 다양한 이유로 사망하고, 그들의 재산은 ‘합법적으로’ 백인 남편의 차지가 됩니다. 그렇게 약 30년 동안 오세이지 원주민 60여 명이 살해당합니다. 오세이지족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땅과 석유는 빠르게 백인들 손에 넘어갑니다. 연방정부에서 개입할 때까지 그들의 죽음은 조사도 수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탐욕은 생명을 가차 없이 짓밟고, 힘이 없는 소수민족은 지역 권력을 장악한 백인 집단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일방적인 학살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버트 드니로가 분한 악당 빌 헤일은 끊임없이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를 가스라이팅합니다. 반복적으로 어니스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죠. “오세이지족은 좋은 사람들이야. 그들을 사랑해. 그러나 그들은 죽어야 해. 그게 하나님의 뜻이야.” “나도 몰리(어니스트가 사랑하는 오세이지족 아내)를 사랑해. 그러나 그녀는 오세이지족이라 당뇨 때문에 죽을 거야.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지.” 영화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끊임없이 소환되며, 하나님의 뜻이라며 오세이지족을 향해 행해지는 학살과 혐오도 수용됩니다. 빌이 대변하는 백인 언어로 등장하는 하나님은 탐욕으로 인한 살해와 약탈을 정당화하며, 백인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으로 표상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수시로 만날 수 있습니다. 성지 탈환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십자군 전쟁, 현명한 여성들을 학살한 중세의 마녀사냥, 흑인과 이민자들을 향해 저질러진 KKK단의 무자비한 린치(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폭도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행 또는 살해를 의미) 등이 그것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히틀러의 악행도 당시 독일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후에 독일 교회는 공식적으로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참회 선언도 했지만요.
과연 타인을 향한 혐오, 폭력, 살해가 하나님의 뜻일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 즉 “하나님 =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의 어디에 폭력과 혐오가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런 폭력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일까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어니스트 버크하트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로버트 드니로의 빌처럼 욕망에 미친 악당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순진하고, 어리숙합니다. 그러나 악한 면도 있습니다. 빌을 도와 거리낌 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인물이거든요. 사실 영화 내내 어니스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당뇨가 있기는 했지만, 건강한 편이었던 아내 몰리는 빌의 악행을 돕는 동네 의사가 처방해 준 인슐린을 맞으면서 급격하게 증세가 나빠지고 결국엔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몰리는 자신이 먹는 무언가에 독이 들었다는 의심을 하게 되고, 사랑하는 남편 어니스트에게 오직 당신만이 내게 약을 줄 수 있고, 다른 이들이 준 것은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니스트는 의사를 대신해서 몰리에게 인슐린 주사를 성실하게 놔줍니다. 맞으면 몰리의 증세가 나아질 것이라고 믿으면서요. 그러나 사실 그 인슐린 주사에는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습니다. 증세가 한없이 나빠지는 아내를 보면서 어니스트는 그저 상태가 좋아지기 전에 일시적으로 그러는 것이겠지··· 하면서 빌이 해준 말을 그대로 믿을 뿐입니다. 그 와중에 그는 몰리의 가족이 가진 돈을 취하기 위해 그녀의 모든 것인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차례차례 살해합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러는 사이에도 그는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는 착한 사람인 걸까요, 나쁜 사람인 걸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을 느끼며 저 자신에게 질문했습니다. 제 결론은 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선과 악의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 생각하지 않는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그저 믿고 자신의 판단은 없이 따르기만 하는 사람,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1960년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의 핵심 가해자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붙잡아 이스라엘로 데려왔고, 1961년 아이히만을 전범재판에 세웁니다. 나치 독일을 가까스로 탈출해서 미국에서 살고 있었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가르치던 대학의 강연을 모두 취소하고 이스라엘로 날아가 재판을 방청합니다. 그는 재판에 출석한 아이히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의 민족을 몰살시킬 뻔했던 유대인 학살의 최고위급 전문가였던 아이히만은 당연히 아주 사악하고 악마 같은 사람일 거로 생각한 아렌트는 의외로 그가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랍니다. 아이히만의 정신을 감정한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심지어 그의 정신 상태가 매우 바람직했으며, 가족에게는 매우 헌신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착하고 선한 이웃이자 시민이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아니 대체 왜 이 바람직한 사람이 그런 악행에 참여했던 걸까요?
아렌트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선량하기까지 한 개인이 그토록 거대한 악에 동조할 수 있는 이유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으로는 좋은 사람이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 것, 남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그가 600만의 유대인을 몰살시키는 행위에 가담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아이히만처럼 영화의 어니스트는 사악한 인물이 아니지만 생각하지 않은 채 빌이 시키는 행위를 실행함으로써 결국 거대한 악을 낳는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마태복음 2장 12절)
2024년 1월 7일의 성서절기 복음서는 마태복음 2장 1-12절로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와서 헤롯 왕을 만나고 그 후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가장 힘 있는 권력자였던 헤롯 왕은 동방박사에게 아기 예수가 나신 위치를 자신에게 돌아와 자세히 알려달라고 부탁(이라고 쓰고 명령이라고 읽습니다)합니다. 자신도 새로운 왕에게 경배하고 싶다는 이유였지요. 그러나 동방박사는 성령이 꿈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다른 길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헤롯 왕이 원하는 정보는 알려주지 않은 채요.
‘꿈을 통해’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성서는 이야기하지만, 혹시 동방박사가 헤롯의 요청에 대해서 ‘왜?’라는 의문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동방박사가 ‘헤롯이 명령한 대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고 질문했기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꿈이나 양심을 통해, 혹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기에 그들은 헤롯이 행하고자 했던 거대한 악에 동참하지 않은 채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영화 제목인 <플라워 킬링 문>은 오세이지족의 언어로 5월을 의미하는데, 5월은 대자연이 초원에 펼쳐놓은 작은 보랏빛 들꽃들이 키가 큰 다른 식물에 의해 말라 죽어 가는 시기입니다. 원주민들은 5월의 달은 꽃을 죽이는 달이라는 의미로 ‘플라워 킬링 문’이라고 부릅니다. 탐욕과 야만의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며 ‘왜’라고 질문할 때 멈춰질 수 있습니다. 키가 크고 힘이 세다는 이유로 약한 자들을 압제하는 권력에 ‘옳지 않다’라고 소리칠 수 있을 때 멈춰질 수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고 사유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사유를 통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성품을 조금 더 닮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이메일 tkim@umnews.org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