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상자 속의 고양이가 살았을까 죽었을까 하는 사고 실험을 통해서 양자역학의 불완전한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눈을 뜨고 있을까 감고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바꾸어서 이정용의 신학을 소개한 임찬순 목사의 책 <역과 모퉁이의 신학>에 대한 서평을 쓰기로 했다. 예가 달라졌으니, 이제부터는 그 고양이를 ‘임찬순의 고양이’로 부르겠다.
만약 독자들이 ‘임찬순의 고양이’에 대해서 흥미를 느낀다면 <역과 모퉁이의 신학>을 정말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왜냐하면 ‘임찬순의 고양이’가 눈을 뜨고 있을까 감고 있을까에 대한 답은 “고양이와의 관계에 따라 다르다”가 맞는 답이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있던 고양이가 상자가 열리면서 당신이 반가워서 눈을 뜰 수도 있고, 눈을 뜨고 있던 고양이가 상자가 열리면서 당신과의 눈맞춤을 피해 얼른 눈을 감을 수도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아 있고 동시에 죽어 있다는 존재론적인 역설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임찬순의 고양이는 누가 열고 언제 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정용의 신학은 관계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정통주의 해석학은 성경의 메시지는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기 때문에 독자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하다는 일종의 고전주의적이며 이성주의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해석학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고양이는 눈을 뜨든지 감든지 흑백논리에 따라 한 가지 경우만 정답이다. 신정통주의 역시 우리는 상자를 열지 않고는 고양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지만 (절대적 타자이신 하나님), 기술적으로 들여다보면 (이 경우는 특별 계시라고 해석되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한 가지 답이 나와야 한다. 여전히 흑백논리다. 그러나 이정용은 해석학적으로는 독자 반응 비평의 계열에 서 있다. 즉 누가 여느냐에 따라 고양이 눈은 뜨거나 감거나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해석자의 삶의 자리와 해석자의 상황이 본문의 삶의 자리와 저자의 상황보다 더 중요해진다. 여기에는 흑백논리가 아닌 관계논리가 통한다.
이런 관점에서 신학을 하면,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이 어떤 상황에서 신학을 하는지를 들려주어야 한다. 책의 첫 몇 장이 이정용의 삶의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신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 신학이 의미 있게 다가오고 그 성경 해석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죄”라고 열심히 말하다가도 자기 손자가 동성애자라고 선언하면 갑자기 “죄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이정용의 신학에서는 충분히 이해된다. 관계 속에서 진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혼이 죄냐 하면 죄라고 하다가 자기 딸이 이혼하면 어떤 이혼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역과 모퉁이의 신학에서는 가능하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입장과 태도가 달라지는 상황윤리라기보다는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윤리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모든 살인(Homicide)이 살인(Murder)이 아니고 정당방위나 사형집행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윤리에 가깝지만, 살인자(Murderer) 아들을 여전히 내 아들이라고 사랑하는 것은 관계윤리이다. 무속이나 주역을 신학적 주제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관계윤리적 결정이지 외국 사람들이 요구하는 주제라서 선택했다는 상황윤리적 결정이 아니다.
임찬순 목사의 <역과 모퉁이의 신학> 표지, 제공, 임찬순 목사.
이정용에 따르면 본질과 실체를 말하는 서양의 고전주의와 거기에 입각한 신학은 실체가 관계뿐이라고 주장하는 후기 현대 혹은 탈현대의 입장에서 볼 때 (포스트모던을 연속성에서 보고 후기 현대라고 하는 이도 있고 단절로 보고 탈현대라는 이도 있다) 넘어서고 벗어나야 할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들이 없이는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라는 실체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시에 태어나는 것이다. 즉 관계가 태어나는 것이고 관계가 실체이다. 남편이나 아내는 본질이 없고 둘 사이의 관계만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도 관계적인 용어이므로 이정용의 신학은 신의 본질을 말하지 않고 신과 신의 백성의 관계를 말하고 신이 백성 때문에 상처받는 관계 속에서의 상처를 말한다.
양자역학은 관찰자에 따라서 관찰 대상이 달라진다고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나를 꽃이라고 불러주면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된다. 내 본질과 실체가 꽃이 아니고 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꽃이다. 그러니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왕후장상이라고 하는 신분 질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하면서부터 해체된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본질에 관한 질문이 아니고 내가 누구와의 관계에서 어떤 누구인가 하는 관계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 대답이 수시로 변한다. 혼외자와 처녀 엄마도 그냥 본질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한 사람과 거룩한 여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관계적인 개념이다.
이런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고, 변화다. 과정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직선이라면, 변화는 양방향으로의 역전할 수 있는 원이다. 서양의 일직선 시간은 동양의 원형 시간과는 다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 신학이 넘지 못하는 벽이 이정용의 역과 모퉁이의 신학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현재에 달렸다는 것은 일직선이지만, 과거도 바꿀 수 있고 현재는 없다는 것이 원형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이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며 달라지는 이유는 누가 누구와의 관계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정용의 신학을 하는 것이다.
모퉁이라는 개념도 본질을 말하는 실체가 아니다. 누군가의 관계에서 나는 중심일 수도 모퉁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모퉁이가 되기를 추구하는 데 바로 역의 신학이 있다. 그 역의 핵심은 겸손(Humility)과 나눔(Sharing)이다. 이는 비움(Kenosis)의 양면이다. 계속 비우는 가운데 원은 속에 아무것도 차지 않고 계속 돌면서 변한다. 그래서 고양이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는 그때그때 다른 것이다. 독자들이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다면 역과 모퉁이의 신학도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이야기가 전혀 관심 밖이라면 이 책도 그저 이정용이라는 사람의 자서전이나 대화록 정도로만 흥미가 있을 것이다. 단,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이 책은 이정용에 대한 임찬순의 절절한 사랑 고백이다. 임찬순과 이정용 사이에 끼어들어 삼각관계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 관계는 아주 독특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정용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오해받지 않는 새로운 독서를 하지 않으면 위험해질 것을 경고한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이정용과 독특한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 그 관계에 대해 나중에 책을 쓰든지 논문을 쓰든지 설교한다면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생길 것이다. 나는 그런 일들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요량이다. 자, 그럼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행복한 시간을 가지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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