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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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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알지어다"

시편 46편

이 자리에 참석한 텍사스 연회 대의원들은 어디에 앉아 계신가요?

지난해 저는 텍사스 연회에 참석하는 특별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비 감독의 초청으로 텍사스에 갔는데, 사실 저는 ‘연회의 분위기는 어떨까? 그런 슬픔과 트라우마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라는 불안과 불확실성,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과 걱정되는 마음을 안고 갔습니다. 당시 텍사스 연회는 탈퇴로 인해 53%의 교회를 잃은 상태였으니까요.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겪은 일은 지난 몇 년 동안 있었던 일 중 최고였습니다. 텍사스 연회에서 즉시 깨달은 것은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키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나 다른 연사가 연합감리교회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사람들은 박수를 보냈고, 또 어떤 때는 누군가가 "저는 연합감리교인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들이 연합감리교인들이 함께한 그 자리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한 가지 제안이 나왔습니다. 보수, 온건, 진보적 성향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젊은 성직자들과 평신도 그룹에서 나온 제안이었습니다. 바로 "하나가 되자(That We May Be One)“라는 제목의 제안이었는데, 줄여서 TWMBO라고 합니다. 저는 보수와 진보에 크게 동조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반면에, 반면에, 반면에, 반면에, … 따라서(whereas, whereas, whereas, whereas, whereas,... therefore)’에 지쳐 있었죠.

하지만 이 경우의 ‘반면에’는 더 현실성 있고, 더 의미 있으며, 지금 이 순간의 필요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 반면에, 우리는 갈등과 분열, 권력 정치와 경쟁의 계절에서 회복하고 있습니다.

- 반면에, 이러한 문화가 소수에게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단합과 집중, 그리고 희망보다는 분열과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 반면에, 남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고, 성서와 교회의 역사적 신조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합니다.

- 반면에, 앞에 놓인 새날은 옛 방식을 버리고, 죄를 회개하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부흥을 받아들일 기회입니다.

- 따라서, 희망의 정신으로 전진하고 개혁의 계절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합니다.

- 그러므로, 연합감리교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합니다.

- 그러므로, 연민과 용기, 그리고 동반자 관계로 특징지어지는 문화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 제안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라는 부름이었고, 함께 일하라는 부름이었으며, 교회를 되찾고, 부흥시키며, 새롭게 하라는 부름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제안은 보수, 중도, 진보 등 다양한 신학의 스펙트럼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제안이 올라왔을 때, 세부 사항을 따지거나 세밀하게 관리하지 않았습니다. 힘든 기간을 지나온 후, 우리는 전체를 치유한다는 것이 단순히 어떤 특정 지점에 도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랬던 것 같아요.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관중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대부분이라고 말한 이유는 몇몇은 흐르는 눈물을 닦느라 제대로 박수를 못 쳤기 때문입니다.

이 제안의 통과는 결심에 따른 결정이었습니다:

- 연합감리교회가 성경, 교회의 교리, 예수님의 부활,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 능력을 믿습니다.

- 교회를 재건하고 그 일을 함께하겠다는 헌신에 기반한 결정이었습니다.

- 연대주의(connectionism)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책임감 있는 관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인식함으로써, 연결을 위한 헌신으로 양육되고, 비옥해진 은혜로 충만한 일치를 이루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 하나님이 연합감리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소망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깊은 믿음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지난 5년간 어디에 계셨나요? 무슨 일을 하고 계셨나요? 연합감리교회가 모이기 시작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는 궁금합니다. 이 자리, 연합감리교인들이 모인 이 자리에 함께하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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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정신으로 개혁의 계절을 받아들이고, 연합감리교회의 부흥을 위해 헌신하며, 연민과 용기, 그리고 동행으로 특정되는 문화를 위해 일할 의향이 있습니까?

진심으로 “만약 이에 동의할 수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건가요?"라고 묻게 됩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연합감리교회를 단순히 사랑하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갱신과 부흥, 그리고 재생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전진시키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서사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은 잘못 오신 걸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담아 여러분에게 그저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를 요청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이야기나 개인적 의도 또는 복수심에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지난해 저와 이 자리에 모인 몇몇 사람은 연합감리교회 내 대부분의 선교사님을 만날 기회를 가졌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엄청난 변화를 겪은 교회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재정적이고 행정적인 변화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빈곤, 글로벌 이주, 인신매매, 총기 폭력, 아동 학대, 전쟁 광기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정이 감소하는 교회의 현실에 대해 선교사님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식민주의를 해체하기 위해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주민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를 만들기 위해 과감한 조치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세계 어딘가에서, 삶이 위태로운 누군가가 교회의 아낌없는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합감리교회의 사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법안을 통과시켜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 곳에서 소명과 확신, 그리고 희생과 사랑에 기반해 이미 그들이 시작한 변화에 동참하고 따를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제가 로마서 8장 28절의 본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본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최근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2020년에 만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과거의 총회보다 더 혼란스럽고, 해로우며, 전형적인(어쩌면 더 그랬을 수도 있는) 총회였을 수도 있었을 거로 생각하기 때문에, 2020년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을 쓰지는 않습니다.

조금 늦은 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연합감리교회가 불과 4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4년이 지난 지금이야말로, 인생의 다음 장을 함께 시작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약간의 먼지는 가라앉았고, 희망과 가능성 있는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의 성향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트라우마를 겪을 때,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말을 늘어놓기 쉽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방의 잘못이라고 하면서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 이전 총회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해 봅시다.

- 우리의 자원이 적은 것은 모두 그들의 잘못이라고, 탈퇴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해 봅시다.

- 감독이나 사법위원회 또는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왜 다른 결정을 내리지 않았냐고 손가락질해 봅시다.

-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해 봅시다. 그들도 우리처럼 생각한다면, 교회가 해야 할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쉽죠. 하지만 이런 자세가 무슨 도움이 있을까요? 

남에게 손가락질 한다고 일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번에 미래를 위해 교회가 본질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한 채, 다른 신학적 관점을 가진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모여 일치와 존중, 그리고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변화를 위해 스스로에게 손가락질을 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프란시스 애스베리는 <마음과 교회 분열의 원인과 치료>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해야 할 때,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합니다."

매년 부활주일이면 우리는 마리아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 그리고 배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 등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후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은 부흥과 쇄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기 전에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로 트라우마의 악순환을 끊으셨습니다.

이번 총회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다면, 정말 적극적으로 총회에서 예수님을 찾는다면, 우리도 실제로 트라우마의 고리를 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과연,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2019년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한 이후로, 지난 4년간 우리는 이런 종류의 대화에 참여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비난으로 가득 찬 대화도 있었고, 냉혹한 현실로 가득 찬 대화도 있었습니다. 코로나, 포스트 코로나, 지속 가능성 감소, 교단 탈퇴, 인종차별, 배제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때때로 서로의 영혼과 희망을 앗아가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이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이란 말은 ‘이후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작품, 사건, 순간, 인물’로 정의됩니다. 지금이 바로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이자 새로운 목적과 에너지를 가진 교단으로서 앞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보세요. 헌금이 줄고, 우리의 가용 재원이 감소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간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교회의 사역을 재구성하고, 교회의 미래를 새롭게 정의할 길을 모색할 기회입니다.

연합감리교회는 이전과 다릅니다.

이곳 샬럿에서 우리는 각 지역의 다양한 상황과 고유성을 존중하고, 모든 사람이 한 가지로 통일된 방식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지난 52년간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방법에 대해 모래 위에 선을 그어왔지만, 생명의 물이 그 선을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연합감리교회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식탁에 환영받고, 다양함이 인정된다고 말하는 성례전 신학을 실천할 멋진 기회를 가졌습니다.

위대한 선포자로서 연합감리교회는 이곳 샬럿에서 연합하여 깨어진 세상을 섬길 뿐 아니라, 교회를 갈망하는 실종된 세대의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도록 실천의 방향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말로만 신념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념에 대해 확신하고, 기쁨을 가지고 실천하는 그런 교회를 찾는 젊은이들 말입니다.

연합감리교회는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 우리에겐 단순히 예배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꿈꿀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의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동료 연합감리교인들로 가득한 이 자리에 있음을 기뻐하십니까?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지만, 이 자리에서 연합감리교회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새로운 날을 향해 달리는 기차에 올라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겐 앞으로 며칠간 점검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실제로 연합감리교회의 부흥이 법안을 통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설교는 좋았지만, 기막힌 제안은 언제 나올까요?"라며, 비즈니스 세션에서 갱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2024년 4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열린 연합감리교회 총회의 개회예배에서, 전 세계에서 온 5명의 연합감리교회 감독이 총회의 참석자들과 성찬을 나누고 있다. 사진, 폴 제프리, 연합감리교뉴스.2024년 4월 23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열린 연합감리교회 총회의 개회예배에서, 전 세계에서 온 5명의 연합감리교회 감독이 총회의 참석자들과 성찬을 나누고 있다. 사진, 폴 제프리, 연합감리교뉴스.

여기에 진정한 제안이 있습니다.

성령이 이 공간에 임재하시도록 허용하여 우리 마음의 새로운 회심을 추구하고, 법안이 연합감리교회에 필요한 부흥의 근원이 아니라, 부흥의 나무에 있는 가지가 되도록 주님의 능력에 맡기기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연합감리교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가지는 것, 즉, 과분하고 놀라운 은혜로 덮인 풍성한 사랑의 모델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기로 결단하는 것은 어떨까요?

왜냐하면 여러분 중에는 우리 앞에 있는 안건에 집중하는 순간 마이크를 잡고, 발언의 숨은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며, 거친 비난을 하고, 심지어는 감히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드리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정말 옛날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인종차별, 성차별, 제한적, 식민주의, 쇠퇴, 탈퇴와 같은 단어가 최근 몇 년간 대부분의 대화를, 말 그대로 지배해 온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어제가 미래의 성화된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 나은 건가요? 정말인가요?

지금 여기에도 인간의 특권과 불안이라는 인간적인 감정, 그리고 두려움으로 인한 인간적인 망설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일은 아마도 "입법위원회는 어떤가?"보다 "당신의 영혼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라고 묻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번 총회의 처음 주제가 좋았습니다. 처음에 우리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 알지어다(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팬데믹 기간 우리는 주제를 줄였습니다. 팬데믹 동안 우리는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너무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으니,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라는 뜻으로, 주제를 "내가 하나님인 줄 알지어다"로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원래의 주제를 선호합니다.

시편 46편 10절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인 줄 알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깊은 현실을 말해주는 단순한 문장입니다. 변화하는 지구와 변화하는 문화, 흔들리는 산과 포효하는 물결, 총기 폭력과 전쟁의 광기, 심지어 변화하는 교회 속에서 인간의 답은 통하지 않는다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표현입니다. 인간적인 해답은 효과가 없었고 단지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우리가 누군지 알잖아요. 우리는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그 광란 속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가만히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휴전’을 요구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클린턴 맥캔 주니어가 쓴 것처럼 휴전은 단순히 ‘멈추기(Stop it)’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멈추기. 전쟁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멈추고, 또 다른 대량 총격 사건의 폭력을 멈추고, 심지어 우리가 해온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일을 멈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에 계셔서 우리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우선순위를 집중시키며, 새로운 날, 약속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제를 "그리고 내가 하나님인 줄 알지어다"로 줄인 이유를 이해하지만, 저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부분을 더 좋아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 내리는 결정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순간에 처해 있더라도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여기 계심을 알라"라는 말은 절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볼티모어, 시애틀, 루이빌, 덴버, 클리블랜드, 피츠버그, 포트워스, 탬파, 포틀랜드, 세인트루이스에서 순간순간 분노와 불안, 그리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인간성이 드러나는 순간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니 여기 샬럿에서 다시 시작하는 지금, 여러분의 중심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조심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또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사야는 30장 15절에서 "회개와 안식이 너의 구원이요, 고요함과 신뢰가 너의 힘이니... 그러나 너는 이 모든 것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언급한 것처럼 이는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는 것, "나를 내게서 없애시고 나를 당신으로 채우소서"라는 호흡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말이나 관점이 바뀔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다는 것은 ‘강의 흐름이 도시를 기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여기에 계신다는 깨달음의 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서 이스라엘에 시냇물이 흐르는 강을 주신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행복감의 순간이 모든 연합감리교인에게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역경 속에서 자각과 목적의식, 소명감, 회심을 통해 방향을 바꾸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선택받은 무리 중에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볼 수 없었습니다.

- 모세라는 사람은 자신의 말더듬증에만 집중할 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역할을 보지 못했습니다.

- 오순절 순간에 성령이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들려주실 것을 믿지 못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지금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간절히 원하지만, 주저합니다. 희망적이지만, 조심스럽습니다. 열망은 있지만, 자신감이 없습니다. 믿고 싶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의 길은 어떤 모습일까? 잘 해결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함께 일할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그 답이 정확히 숨 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지금 바로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다"라는 TWMBO의 순간 말입니다.

1930년 미국은 대공황의 한가운데 놓였습니다. 공장은 문을 닫고, 농장과 주택은 압류당했으며, 공장과 광산은 버려졌고,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전 세계는 소통보다는 살육을 일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큰 공포와 불안, 그리고 엄청난 불확실성의 시기였으며, 개인적인 고통이 너무 깊어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나 정의를 향한 어떤 노력도 의미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가능성이 암울하고 인간이 주는 대답은 너무 불충분해 보였던 그 시절, 사회복음(Social Gospel)이라는 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을 인식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 중 한 명인 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이 운동의 옹호자로, 모든 격변 속에서 멋진 찬송가의 가사를 썼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God of grace and God of glory),

주의 백성에게 주의 능력을 부어주소서(on thy people pour thy power);

우리 교회의 역사에 왕관을 씌우시고(crown thine ancient church’s story);

위에 영광스러운 꽃을 피우소서(bring her bud to glorious flower).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십시오(Grant us wisdom, grant us courage),

시간을 마주하게 하소서(For the facing of this hour).

시간을 마주하고 있나이다(For the facing of this hour).

주님 자녀들의 지닌 전쟁의 광기를 치료하소서(Cure thy children’s warring madness),

우리의 교만을 주님의 통제에 굴복시키소서(Bend our pride to Thy control).

우리의 무분별한 이기적인 기쁨을 부끄럽게 하소서(Shame our wanton selfish gladness),

물질은 풍족하고 영혼은 가난한 저희를 부끄럽게 하소서(rich in things and poor in soul).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소서(Grant us wisdom, grant us courage),

우리가 주의 왕국의 목표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Lest we miss thy kingdom’s goal).

우리가 주의 나라의 목표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Lest we miss thy kingdom’s goal).

우리 역시 과거와 미래의 갈등 그 중간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를 위해’ 부름을 받은 연합감리교인의 정체성을 분별해야 할 방향과 내려야 할 결정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우리 자신에게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또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크게 줄어들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벅차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성향이 너무 쉽게 움직이고, 우리가 알기도 전에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주의 백성에게 영광의 하나님, 당신의 능력을 부어주소서.

여러분, 솔직하게 말합시다. 고백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가 찾는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없습니다. 앞에 놓인 기회를 알고 있지만, 바른 방향, 올바른 행동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 또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연합감리교회를 새롭게 하고 부흥시키며,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우리가 꿈꾸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넘치도록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의 역사에 왕관을 씌우시고, 주의 백성에게 주의 능력을 부어주소서.

솔직히 말해서, 연합감리교회의 역사 중 일부는 왕관을 쓸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인종차별적이었고, 지나치게 성차별적이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 못한 잘못으로 인해 너무나도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사역 방식은 지나치게 식민주의적이었고,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실수를 자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교회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재능 있는 사람들이 리더십으로 부름을 받았고, 물질은 부유하고 영혼은 가난한 우리의 전쟁 같은 광기와 이기적인 기쁨의 한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이 여정을 해왔습니다. 

연합감리교회는 재난의 한가운데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생명과 건강을 돌보는 사명을 가진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신학을 가진 교단입니다. 우리에겐 가난한 사람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옹호하는 사회 복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합감리교회의 고백이며, 우리의 노래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의 역사에 왕관을 씌우소서.

위에 영광스러운 꽃을 피우소서.

우리 주변에는 가능성의 싹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진짜 질문은 우리가 과거의 잘못과 실수에 작별을 고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 교회는 더 이상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교회가 전날보다 더 무의미해졌다며, 우리를 지나쳐가고 있습니다. 유래 없는 좌절과 우리를 두렵게 하는 필수적인 변화에 직면한 지금, 우리는 미래를 위한 진로를 설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비료와 물을 주고,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햇빛과 그 보살핌을 맡은 정원사의 부드러운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면, 이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찬란한 꽃으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 위에 영광스러운 꽃을 피워나게 하소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십시오, 시간을 마주하게 하소서.

저는 설교할 때마다 입을 열기 전에 같은 기도를 반복하며, 내 머리와 가슴을 채웁니다.

"오 하나님, 저에게서 저를 제하시고, 제가 아닌 주님으로 채워주세요. 오 하나님, 저에게서 저를 제하시고, 제가 아닌 주님으로 채워주세요.”

이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저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고백이요, 기도입니다.

이제 총회를 시작하는 여러분의 기도가 저의 기도와 비슷한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제하시고, 주님으로 채워주세요. 우리에게서 우리를 제하시고, 지혜를 허락하소서. 이 시간을 정직하게 바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제하시고, 용기를 주소서. 이 총회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하소서.

여러분, 지금은 우리의 순간이며,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간이며, 섭리적인 시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회이며, 전례 없는 기회입니다.

이 시간을 위해.

이 시대를 살기 위해.

우리가 주님의 왕국의 목표를 놓치지 않도록.

우리 서로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우리가 예배하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준비됐나요?

이번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대로 해볼까요?

그렇게 되길.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이메일 tkim@umnews.org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


교단
2024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까지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연합감리교회 2020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래픽, 연합감리교 공보부.

총회에 관한 한인총회 등 공동 목회 서신 발표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총회장 이창민 목사)와 한인목회강화협의회, 그리고 연합감리교회 한인선교구는 2024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 사이에 열린 2020 연합감리교회 총회와 관련한 공동 목회 서신을 발표했다.
교단
2024년 5월 3일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열린 연합감리교회 2020 총회에서, 재무행정협의회 총무인 모세 쿠마르 총무가 대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총회 대의원들은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General Board of Global Ministries)가 제출한 한인목회강화협의회의 보고서와 예산 300만 달러를 647대 31의 압도적인 투표로 승인했다. 사진, 래리 맥코맥, 연합감리교뉴스.

총회, 2025-2028 한인목회강화협의회 예산 승인

연합감리교회 총회 마지막 날인 5월 3일, 총회 대의원들은 연합감리교회 세계선교부가 제출한 한인목회강화협의회의 한인목회플랜 보고서와 예산 300만 달러를 승인했다.
교단
한인 교회 목회자들이 라오스로 파송받아 섬기게 될 김데이빗 목사와 이소라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5월 2일 마무리: 성소수자에 대한 언어가 삭제되다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는 2024년 5월 2일 열린 2020 총회에서, 새로 파송된 16명의 선교사를 포함한 세계선교부 140명의 선교사 모두를 지원하겠다는 대담한 결단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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