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연합감리교뉴스는 교단 내 이슈에 대한 다양한 논평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논평은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며, 연합감리교뉴스의 의견이 아닌 필자의 개인 의견입니다. 연합감리교뉴스는 언제나 다양한 의견을 담은글을 환영합니다.)
-늘 수고의 땀방울을 흘리며 헌신하고 계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우리가 기대하는 것
가족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섬기던 교회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병원에서 걱정스러운 마음을 부여잡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던 (자기 연회 소속도 아닌) 목사를 그 지역 연회 감독님이 심방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목사는 그 연회 행사에 화환을 보내 감사의 마음을 나누었는데, 그 연회 감독은 이를 몹시 감격하며 그 화환 앞에서 사진을 찍고는 교회에 부탁해고 그 화환을 가져갔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기대하는 이와 같은 리더십은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여기서 연합감리교회의 멋짐과 자부심을 떠올리며, 마르다처럼 드러나지 않게 헌신하며 연합감리교회를 빛내는 분들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합/연대 사역(Connectionalism)
바쁘다는 단어를 늘 입에 달고 사는 목사들에게, 개 교회 사역 이외에 다른 사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큰 도전입니다. 연합감리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는 연회와 지방회에서 위원회 활동을 해야 하고, 여기에 코커스나 지역총회 활동이 겹치기라도 하면, 그 목사에게는 강도 높은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연회와 지방회의 각종 위원회 활동이야 의무라는 생각이 들지만, 코커스와 연합회 사역을 맡는 경우라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요. 특정인에게 일이 집중되는 경우가 잦고, 그러다 보니 에너지를 쏟은 만큼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고민하는 이들을 자주 봅니다.
작년과 올해 여름 ‘서부지역목회자가족수양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저를 비롯해 많은 임원의 큰 헌신과 희생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진지하게 연합 사역과 코커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역동적인 상황을 정리하고 나눌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어려움: 무관심
연대사역에서 마주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관심입니다. 생각과 기대에 비해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지 않거나 시기적으로 관심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선택받은(?!) 임원들은 그 일을 완수해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작년에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 임원들 사이에 올해는 수양회를 진행하지 말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노력한 만큼 성과는 나지 않거나, 기대 또는 관심이 떨어지는 일에 헌신하거나 희생하는 분들의 사기는 쉽게 꺾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꽤 오랫동안 교단 탈퇴와 함께 한인연합감리교회 전체가 흔들렸던 시기에 연합사역을 진행하는 일은 그 자체로 큰 어려움이었죠. 이런 현실에서, 연합 사역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의견들은 이 일을 진행하는 임원들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어려움: 줄어든 후원금
제일 먼저 마주친 어려움은 늘 매년 이루어졌던 목회강화협의회 후원의 중단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후원금은 연합사역이나 목회자 가족 수양회를 준비하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자 종잣돈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기대가 사라지니 막막함이 몰려왔습니다. 사정은 신청서를 등록하는 기간이 지나서 지급될 수 없다는 응답이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하필 지금 이 시기에 냉정하게 지원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걱정과 일을 함께 진행할 임원들은 늘 바뀌고 개교회 목회를 하는 입장에서, 정해진 일정과 마감 기일을 누가 정확히 알아챌 수 있겠느냐고 호소해 보았지만, 요지부동의 현실에 이 막막함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여기에, 교단 총회 이후 악화된 한인 교회 정서는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연합/연대 사역을 후원하는 데 부담을 느끼는 실정이었죠. 예전에 비해 거의 1/10의 후원만으로 행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현실에 부딪쳐서는 재정적 부족함보다, 이 상황을 짊어지고 해내야 한다는 명분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모여야 한다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감만 가지고 막막한 현실을 뚫어낼 수 있을지, 행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제법 큰 부담을 안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담감을 이겨내게 해준 것은 결국 공감하는 분들의 후원이었습니다. 펀드를 책임진 회장님이 다양한 아이디어로 펀드 항목을 만들었고, 어렵게 내민 손을 민망하지 않게 공감하며 도와준 코커스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래도 함께 모여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다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물질의 부족이 힘들었다기보다 관심과 이해가 부족한 현실에 통증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공감해 주고 이번 행사를 기꺼이 후원해 준 분들은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어려움: 지속적인 분열 상황에서 연합과 연대를 호소하며
또 다른 어려움은 총회 이후 기독교대한감리회 안에 연합감리교회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그룹이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이 모임에 서부 지역 연합감리교회 선배 목사님이 강사로 참여했다는 한국 교계 뉴스는 큰 낙심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겠지만, 한인연합감리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온 가치와 공교회성, 그리고 조국의 어머니 교회에서 자란 저로서는 이런 단절과 위협은 연합하고 연대하는 사역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세워오는 데 오랫동안 함께 공들여 쌓아온 가치들을 과연 이렇게 순식간에 바꿔도 되는 걸까? 우리 안에서 이런 문제를 충분히 고민했을까? 여전히 연합감리교회에 남아 개교회에서 힘들게 헌신하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에 대한 고민은 있었을까?
여전히 헌신하는 평신도들과 목회자들을 기억하며
이제는 익숙해진 교단총회의 후폭풍은 사실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미국 전역에 있는 한인연합감리교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특정 지역, 특히 남가주 지역에서 심각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우리들이 곰곰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동일한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이 다른 것은 다른 지역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분열되고 깨지는 것만큼은 막으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불편함을 또는 어색함을 함께 견뎌내며 버티는 목회자와 교회가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런 반면에 남가주 지역은 개인의 문제, 연회와의 불통, 여기에 연회의 부족한 리더십들이 이상한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서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남가주만의 문제를 한인연합감리교회 전체의 문제로 끌고 가려는 생각은 목회 현장에서 여전히 교회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노력에 관심이 없는 태도로 보입니다.
답을 찾을 때까지
이 두 가지 문제를 짊어지고 서부지역목회자가족수양회를 진행해야 하는 것은 큰 도전이었습니다.
무관심한 상황을 관심으로 끌어내고, 부족한 물질을 채워야 했고, 망가진 분위기를 회복시켜야 하는 것까지 책임을 져야만 이 수양회가 잘 끝날 것이라는 생각에 수많은 번민이 함께 저를 덮쳤습니다.
가족 수양회는 근 40년 이상 진행되어 온 유서 깊은 행사입니다. 서부 지역 연합감리교회 목사님들이 젊었을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중고등부를 마치고 졸업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함께한 특별한 시간이자 각별한 추억입니다. 그런 행사가 교단 분리 문제로 서로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고 어떤 사람의 리더십이 문제였을까? 이런 질문들이 준비하는 내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은퇴 목사님들도 서로 생각이 달라지고, 교회도 생각이 달라지고, 목사들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달라진 생각이 과연 우리를 넘어서 연합감리교회에서 함께 큰 은혜와 관심, 도움을 받은 모든 것들을 무효화하고, 순식간에 분노와 불신으로 휩싸이게 할 만한 것인가? 이런 현실 앞에 연합사업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누가 이 일들을 감당해 나갈 것인가?
여기에 이런 사역을 수행하는 데 용기를 줄 만한 힘, 우리들의 마음을 화합으로 끌어낼 사역의 힘은 누구로부터 올 것인가? 개인의 희생일까? 연회의 도움인가? 한인 감리사들의 노력일까? 한인 감독의 헌신일까? 한인 교회들의 희생일까? 한인총회가 잘 열리면 될 것인가? 우리를 하나로 엮어낼 희생은 과연 누구에게 필요하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
어렵게 가족 수양회를 마치고 든 생각은 여전히 마르다처럼 자신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분들의 헌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보다 못한 마르다로 성경을 읽어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본문에는 분명히 예수를 집으로 모신 사람은 마르다였고, 이런 마르다의 용기와 헌신으로 많은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마르다는 이것으로 충분히 그 은혜를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멈출 수 없는 기대
새롭게 다시 드는 생각은 우리 안의 모든 마르다 “님”을 모아 함께 일을 도모하면 큰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기대, 여기에 모두가 관심 두는 곳에만 힘을 쏟는 지금까지의 방향을 틀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지역과 교회로 시선을 돌리기가 오히려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 등을 해봅니다. 그래야 온 가족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이상적인 생각을 해보지만, 이런 일이 과연 우리 공동체 안에서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용기 있게 다시 마음을 들어 올리면, 역시나 희생과 노력은 예상치 못한 열매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개입은 우리를 늘 겸손하게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시간은 가고, 우리는 이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눈에 띄는 사람보다 묵묵히 마르다처럼 희생하는 자들의 헌신과 기도가 한인연합감리교회라는 희망적인 공동체를 세워가는 버팀목이자 근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 연합감리교회를 통해 배워온 가치와 사역의 방향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힘을 서로 나눠서 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지역총회별 여름 연합 사역을 마치고, 가을에 모이게 되는 한인총회는 바로 이런 당당함이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어디에나 있는 마르다를 기억하고 위로하고 축복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Thomas E. Kim) 목사에게 이메일 tkim@umnews.org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 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