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스크랜튼과 유관순: 교육의 열매

(편집자 주: 2025년 8월 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하이츠에 소재한 세이비어 연합감리교회에서 <오하이오·한국 및 그 너머의 감리교 선교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번 대회는 메리와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의 공헌을 기리고, 기독교대한감리회와 연합감리교회의 선교 역사와 신앙, 더 나아가 선교의 미래를 함께 나누는 자리였다. 이 행사를 위해, 연합감리교회 총감독회 회장인 트레이시 S. 말론 감독, 연합감리교회 샐리 딕 감독,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김정석 감독, 오하이오 감독구 정희수 감독, 박정찬 감독 등이 차례로 설교했다. 연합감리교뉴스는 행사를 보다 자세히 전하기 위해, 다섯 감독의 설교를 순서대로 소개한다. 오늘은 번째로 샐리 감독의 설교를 싣는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집에 이르러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영이 돌아와 아이가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8:49-56

오늘 이 모임은 감리교 지도자 윌리엄과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를 기리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합당한 분들입니다. 두 사람은 한국 역사와 기독교, 그리고 교육에 깊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메리 스크랜턴은 1885년 미국 감리교 감독교회가 한국에 파송한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습니다. 그녀가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 유교적 관습의 영향으로 여성과 소녀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제한받았고, 성평등은 이전보다 더 심각하게 후퇴한 상황이었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은 남편을 일찍 여의었지만, 여성과 소녀들의 삶을 교육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서울에 이화학당을 세웠습니다. 이화학당에 가보신 분 계신가요? 한국인이 아닌 분 가운데 가보신 분 계시나요?

이화학당은 설립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교육, 의학, 철학, 정치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기여를 한 여성들을 배출했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이 이화학당을 세워 여성과 소녀들을 가르친 것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씨앗을 뿌린 일이었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의 삶과 그녀가 뿌린 씨앗을 큰 박수로 함께 우리의 경의를 표합시다.

저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감리교의 ‘거룩한 터전’과 교회, 묘지, 그리고 대학들을 걸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는 제가 특별히 기리고 싶은 메리 스크랜턴 교육의 열매가 있습니다. 바로 유관순입니다.

저에게 유관순을 처음 소개해 준 분은 이종민 목사님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그것은 3월 1일과 관련된 때였고, 아마도 2019년 3월 1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관순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제 마음과 생각을 깊이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저는 메리 스크랜턴의 씨앗을 기릴 때, 반드시 유관순 또한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습니다. 감리교 신앙 안에서 성장했으며, 성경 말씀을 한 번만 들어도 외울 정도로 총명한 소녀였던 그녀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시절, 독립운동의 정신과 영향을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1919년 3월 1일, 한국 전역에서 일본의 지배에 항거하는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유관순도 서울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어 음력 3월 1일에 있었던 평화로운 시위에서 일본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그로인해 그녀의 부모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관순도 그 과정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녀는 일본에 협력하기를 끝내 거부했고, 친구와 선생님들이 그녀를 위해 탄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고문과 굶주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굴하지 않고, 다른 수감자들을 조직해 함께 만세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17세의 어린 나이에 고문과 굶주림으로 옥사했지만, 그녀는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고 있으며, 사후 수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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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크랜턴은 유관순을 가르치고 영향을 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법만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한국 여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시키고,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기 위해 왔습니다.

그 당시 소녀들은 흔히 “작은 아이”라고 불리거나, 가족의 남성 이름에 종속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통해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존귀한 존재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이 감옥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예수와 바울이 매를 맞으면서도 사명을 위해 인내했던 성경 이야기를 떠올렸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시편 23편을 암송하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고, 때로는 다른 이들을 위로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되뇌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하나님의 형상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한국의 잔 다르크’라 부릅니다.

저는 여성이 단지 가족의 남성 관계로만 불렸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예수께서 한 소녀를 고치러 가셨을 때, 그 소녀는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존재로 여겨지는 소녀였습니다. 군중이 이미 그녀가 죽었다고 말했지만, 예수께서는 굳이 그 소녀를 보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아이야” 혹은 번역에 따라 “어린 소녀”나 “소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메리 스크랜턴과 같은 감리교 선교사들은 그 말씀을 따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한 걸음 더 확장해 나갔다고 감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처럼 우리는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억압에서 자유로 들어 올리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과 감리교회의 메시지는 소녀와 여성들이 자신들의 은사와 부르심을 따라, 교회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힘을 주고 있습니까? 또 그들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며,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더 나아가 감리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을 실제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내고 있느냐는 것 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그것이야말로 교육의 풍성한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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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종 목사가 집필한 <애국지사 이대위>. 이대위 목사는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며 대한인국민회를 ‘나라 잃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미국 정부로부터 한인들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진, 김응선(Thomas E. Kim)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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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 목사는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며 대한인국민회를 ‘나라 잃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로 자리매김하게 했고, 미국 정부로부터 한인들의 독립적 지위를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독립운동과 교회 사역을 병행하며 한글 식자기를 발명하는 등 언론·교육 발전에도 기여했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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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론 감독은 “하나님의 선교는 언제나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여전히 역사하고, 그리스도는 여전히 부르시며, 복음은 여전히 기쁜 소식입니다—상한 마음에 주는 기쁜 소식, 은혜를 갈망하는 세상과, 정의를 갈망하는 세상에 전하는 기쁜 소식입니다.”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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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촬영된 여러 신랑 신부의 합동 결혼식  사진. 이대위 목사는 뒷줄 중간에 있다. 사진 제공, 유석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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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 목사는 “단순히 개인의 영적 구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 민족의 구원이라는 더 큰 목표 속에서 목회했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은 한 샘에서 나온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듯 애국 열성의 피로 세례를 받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금수강산의 복지를 되찾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라고 유석종 목사는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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