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미주 독립운동을 이끈 이대위 목사 2

(편집자 주: 이글은 유석종 목사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미주에서 민족운동을 이끈 이대위 목사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활동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정리한 글 2부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 목사 

이대위 목사. 사진 출처, 한인 역사박물관(Korean American History Museum).이대위 목사. 사진 출처, 한인 역사박물관(Korean American History Museum). 

이대위 목사는 자신보다 6개월 먼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동향인 도산 안창호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설립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1913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에 선출된 그는 1919년 3월까지 여러 차례 총회장을 역임하며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고 조국광복운동을 전개했다. 그중 그가 재임 기간 이루어 놓은 가장 큰 공적은 대한인국민회가 나라 잃은 미주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 일의 계기는 이랬다.

1913년 6월 25일, 한인 노동자 11명이 남가주 리버사이드 인근 헤미트(Hemet)의 살구농장에 취업차 도착했으나, 현지 백인 시민과 노동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는 바람에 농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주선했던 최순성은 농장 주인과 협의해 왕복 차비만 받는 것으로 마무리했고, 이를 들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영사가 나서서 손해배상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한인들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워싱턴 DC의 일본 공사는 헤미트에서 한인들이 쫓겨난 사건이 미국의 일미통상조약 위반이며, 한인들이 인본의 지배와 보호 아래 있는 일본 국민이므로 일본이 당연히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섰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접한 이대위 목사는 즉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명의로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Brian) 미국 국무장관에게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일본이 한국을 강제 합병하기 이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므로 일본 국민이 아니며, 국권피탈을 반대하고, 해가 하늘에 떠 있는 한, 일본 정부의 간섭을 절대 받지 않을 터이니,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재미 한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고, 한인 관련 사안이 발생하면 언제든 한인사회(대한인국민회)와 교섭하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의 전보를 쳤다.  

브라이언 국무장관은 전보를 받은 지 이틀 만에, “한인사회와 관계된 일은 일본 정부나 일본 관리를 거치지 않고 한인 단체를 통해 교섭하겠다.”라고 회신했다. 이대위 목사는 헤미트 사건 직후, 재미 한인을 일본인으로 간주하려는 일본의 계략에 신속히 대응해 미국 정부로부터 한인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받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동시에 대한인국민회가 미국에서 나라 잃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 Shadow Government) 역할을 감당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대한인국민회는 나라 없는 한인 유학생과 망명객들의 신원 및 재정 보증을 서줌으로써 그들의 입국을 도왔고, 직장에서 다친 교포들의 보상금 수령에도 힘을 보탰다.   

1912년, 이대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사진 출처, 공훈전자사료관.1926년, 샌프란시스코 한국국어1912년, 이대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사진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에 선출된 이대위 목사는 취임 직후, 정간 상태였던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를 복간해 주필로 활동했다. 그는 지면을 통해 민족의식 고취와 조국 광복의 시급성을 강조하고, 한민족의 단합과 협력을 호소했으며, 해박한 세계사 인식을 바탕으로 한민족이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또한 각 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소개해 동포들의 생활 향상에도 기여하고자 했다.

이대위 목사는 이처럼 일인오역(一人五役)을 수행하면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모금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애국금 수금 위원들을 총괄하던 그는 이승만의 구미위원회와의 마찰로 인해, 애국금 모금이 결국 폐지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한글 인터타이프 식자기(Intertype Typesetting)의 발명

사진, 이대위와 그가 발명한 한글 인터타이프 식자기.사진, 이대위와 그가 발명한 한글 인터타이프 식자기. 

이대위 목사는 발명가이기도 하다. 흔히 한글 타자기 원리를 발명한 사람으로 공병우 박사를 떠올리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19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대위 목사가 한글 식자기를 고안해 <신한민보> 제작에 활용했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연구에 몰두해 완성한 타자식 식자기는 미국 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The Daily Palo-Alto Times>는 “한국어 알파벳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지고, 타자식 식자기가 제작된 것은 세기의 위대한 발전”이라는 부제 아래 “과거 인쇄술의 발달이 유럽에 문예부흥을 가져왔듯이, 동양 국가들이 이 글자, 즉 한글을 사용하게 되면 동양에도 교육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하며, “이 꿈이 바로 이대위의 꿈이었다.”라고 전했다. 이대위 목사가 발명해 오랫동안 사용하던 타자식 식자기는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구(舊)대한인국민회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대위 목사의 마지막 길

1928년 6월 17일, 미주 한인사회는 든든한 기둥과 같던 지도자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미주 한인교회와 한인사회, 그리고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던 이대위 목사가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병환으로 별세한 것이다.

장례식은 교회를 비롯해 대한인국민회와 각 사회단체가 연합해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로스앤젤레스, 멕시코, 뉴욕 등지에서도 그를 기리는 추도회가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늦게나마 이대위 목사의 공적을 기려 1995년 8월 15일,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샌프란시스코 지역 싸이프러스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상항지역에서 구성된 ‘이대위 애국지사 천장위원회’의 노력과 주상항총영사관,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협력으로 2005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애국지사 이대위 목사의 묘비 받침대에는 그가 브라이언 미 국무장관에게 보냈던 전문이 새겨져 있다.

맺는말: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가진 지도자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해외 독립운동가 39인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는 미주를 대표하여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이대위 4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미주에서 이대위 목사가 지녔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애국지사 이대위 목사는 복음운동과 민족운동을 융합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넓히고자 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성직을 지키며 동포들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어주는 한편, 한인 이민 사회의 정착과 조국 광복운동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의 생애는 정치적 야망이나 개인적 영달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된다는 확신 속에 하나님 나라와 조국을 위해 온 삶을 불태운 여정이었다. 그는 철저히 섬김의 삶을 살았으며, 이것이 이대위 목사가 다른 민족 지도자들과 구분되는 점이다.

이대위 목사는 “애국에서 애(愛)자는 재물을 사랑하는 애자보다 크고, 부인을 사랑하는 애자보다 크며, 그 몸을 사랑하는 애자보다 크니, 이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하여 가히 대신 죽을 만한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심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애국이며, 그런 애국심이 있어야 나라를 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선교 열정과 민족 사랑은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로마서 9:3, 공동번역)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뜨거운 심정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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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 목사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을 향해 끊임없이 강조한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동심(同心)이면 먼저 합력(合力)”이다. 일제 강점기, 소수를 제외하고 누가 조국 광복을 바라지 않았겠는가? 국권 회복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마음은 하나였지만, 이대위 목사는 부족한 점이 ‘합력’에 있다고 한탄했다. 그는 “2천만이 합력하면 무슨 일인들 성사치 못하리오!”라고 외쳤다.

애국지사 이대위 목사는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을 구호에 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하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큰길(大道)’을 펼치고자 했던 그가 남긴 신앙적, 정신적 유산은 미주 한인사회는 물론, 세계만방에 퍼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관련 시리즈 기사 보기

일제 강점기 미주 한인사회를 이끈 이대위 목사 1

참고 문헌

성백걸,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과 교회: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 역사, 한들출판사, 2003.

유석종, “이대위의 민족목회와 독립운동”, 미주한인 독립운동지도자 재조명,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유석종, 애국지사 이대위: 생애와 글 모음, 북산책, 2010.

최기영, 잊혀진 미주 한인사회 대들보 이대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유석종, “이대위: 초기 미주 한인사회를 이끈 지도자”, 길 위에 길을 내다: 미주 한인 이민 역사를 만든 16인, 대한기독교서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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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하이츠에 소재한 세이비어 연합감리교회에서 열린 <오하이오·한국 및 그 너머의 감리교 선교 기념대회> 개회예배에서,  연합감리교회 총감독회 회장인 트레이시 S. 말론 감독이 <시대를 넘어 아시아>를 넘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있다. 이번 행사는 메리와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의 공헌을 기리고, 기독교대한감리회와 연합감리교회의 선교 역사와 신앙, 더 나아가 선교의 미래를 함께 나누는 자리였다. 사진, 김응선(Thomas E. Kim) 목사.

시대를 넘어, 아시아를 넘어

말론 감독은 “하나님의 선교는 언제나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여전히 역사하고, 그리스도는 여전히 부르시며, 복음은 여전히 기쁜 소식입니다—상한 마음에 주는 기쁜 소식, 은혜를 갈망하는 세상과, 정의를 갈망하는 세상에 전하는 기쁜 소식입니다.”라고 강조한다.
교회 역사
1914년 촬영된 여러 신랑 신부의 합동 결혼식  사진. 이대위 목사는 뒷줄 중간에 있다. 사진 제공, 유석종 목사.

일제 강점기 미주 독립운동을 이끈 이대위 목사 1

이대위 목사는 “단순히 개인의 영적 구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 민족의 구원이라는 더 큰 목표 속에서 목회했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은 한 샘에서 나온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듯 애국 열성의 피로 세례를 받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금수강산의 복지를 되찾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라고 유석종 목사는 기록했다.
교회 역사
2025년 8월 4일, 오하이오 한인 풍물놀이팀이 클리블랜드하이츠 소재 세이비어 연합감리교회에서 열린 <오하이오·한국 및 그 너머의 감리교 선교 기념대회> 개막 만찬에서 전통 장단에 맞춰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김응선(Thomas E. Kim), 연합감리교뉴스.

오하이오에서 한국까지: 메리 스크랜턴과 윌리엄 스크랜턴의 140년 유산을 기리다

8월 4일부터 6일까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하이츠의 세이비어 연합감리교회에서 메리와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의 공헌을 기리고, 기독교대한감리회와 연합감리교회의 선교 역사·신앙·미래를 나누는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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