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로, 영화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에 대한 현혜원 목사의 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이 장치를 가진 사람이 근처에 있으면 장치가 노래를 시작할 거야. 그건 그 사람을 네 삶을 걸고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주인공 팻(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갓 태어난 딸을 안고 도망치는 중입니다. 혁명 단체 '프렌치 75'의 동료였던 아내가 조직원들의 이름을 넘겨버리는 바람에, 자신의 목숨은 물론 아이의 안전까지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짐을 싸던 팻에게, 동료 조직원 하워드가 작은 수신기 두 개를 건네며 말합니다.
“이 수신기가 노래를 부르면 가까운 거리에 똑같은 장치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뜻이야. 그 사람은 네가 목숨을 맡겨도 되는 사람이야.”
그렇게 팻은 갓 태어난 샬린을 데리고 목숨을 건 도주에 나섭니다. 그렇게 팻은 멕시코 국경에서 가까운 아주 작은 도시 박탄 크로스에 정착해 이름도 밥과 윌마로 바꾼 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시간은 훌쩍 흘러 윌마는 어느새 열여섯 살이 됩니다. 그는 아름답고 강인하게 성장했고, 공부도 잘하며 친구들이 존경할 만큼 의지가 단단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늘 술과 마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버지 밥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밥은 안전에 대한 강박적인 공포로 딸에게 잔소리라는 이름의 고함을 수시로 퍼붓죠. 윌마에게 아버지는 버겁고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젊은 시절, 아내 퍼피디아와 함께 혁명을 외치던 밥은 생기와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투쟁이 이민자와 가난한 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 믿었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퍼피디아의 배신, 그리고 16년간 이어진 도주의 공포는 그의 영혼을 조금씩 서서히 갉아먹었습니다.
학교 축제에 가는 딸에게 수신기를 가져가라며 고함치는 아버지에게, 윌마는 참았던 말을 터뜨립니다.
“한 번도 소리 난 적 없는 걸 왜 가져가요!”
결국 아버지를 이기지 못하고 수신기를 챙겨 학교에 간 윌마. 그런데,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일이 벌어집니다. 16년 동안 침묵하던 수신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난생처음 들은 수신기의 노랫소리에 학교 화장실에서 얼어붙은 윌마.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디안드라였습니다. 과거 밥, 퍼피디아와 함께 혁명운동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녀의 수신기와 윌마의 수신기가 반응하며 노래를 울린 것이었습니다. 16년 전,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도망치는 밥을 차에 태워준 사람 역시 디안드라였습니다.
영화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의 한 장면. 사진 출처, imbd.com."음악이 들리면, 그 사람은 네가 목숨을 맡겨도 되는 사람인 거 알지?”
윌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따라나섭니다. 그 덕분에 그는 생부 록조를 간발의 차로 피해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네, 밥은 사실 윌마의 생부가 아니었습니다.
퍼피디아는 테러 활동을 벌이다 멕시코 접경지대 불법 이민자 수용소 소장인 록조에게 발각되었고, 체포를 피하는 대가로 그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죠. 그가 윌마의 생부입니다. 16년간 딸을 찾지도 않던 그는, 백인우월주의 사조직에 가입할 기회를 얻자,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딸을 죽이려 나타납니다. 퍼피디아는 흑인이었고, 본인에게 비백인의 혈통이 있다는 사실이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황당하면서도,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이후, 술과 마약에 찌든 채 허둥대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딸을 찾으려는 밥과,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고 도망치는 윌마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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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내 윌마는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혁명의 영웅이라 믿었던 어머니는 사실 자신과 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린 배신자였고, 자신은 밥의 친딸이 아니었으며, 생부 록조는 만나자마자 자신을 죽이려 합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며칠 사이에 벌어집니다.
그럼에도 윌마는 울지 않습니다.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주고, 전사처럼 버텨냅니다. 배신자 퍼피디아의 딸이라고 멸시하는 엄마의 옛 동지 앞에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생부 앞에서도, 죽이려고 따라오는 청부살인업자 앞에서도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당당하게 맞섭니다.
그런 윌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너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수신기가 다시 울릴 때입니다. 생부와 살인청부업자의 위협을 간신히 벗어나 숨어 있던 윌마는 음악이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봅니다. 음악이 들려오는 곳에서 지난 16년간 곁을 지켜준 아버지 밥이 나타납니다. 헝클어진 머리, 초췌한 얼굴 그대로. 두 수신기가 가까워지자 노래가 울려 퍼진 것입니다. 윌마는 그제야 아버지 품에 쓰러지듯 안겨 통곡합니다. 전사였던 아이는, 그 품에서 다시 열여섯 살 아이가 됩니다. 아버지는 무너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
피로 이어진 부모는 아이를 버리거나 죽이려 했습니다. 아이를 살린 것은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흑인 여성, 원주민의 피가 섞인 청부업자,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마약중독자 밥이었습니다. 순혈 백인우월주의를 외치는 록조의 세상에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사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피와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 속에서, 수신기가 울릴 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집니다. 총성과 비명, 추격과 공포로 가득 찬 이야기 한가운데서 그 노래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흐릅니다. 숨을 죽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래서 두 번 모두 관객에게 “잠깐, 멈춰서 이 순간을 들어봐” 하고 말하는 듯합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 속에서, 오직 믿음의 장치 둘이 가까이 다가올 때만 울리는 그 멜로디는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습니다. 마치 감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폭력과 증오 속에서도, 이 모든 불신과 배제 속에서도, 사랑은—여전히 사랑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사랑은 사랑이라고 외치고 싶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강절이네요.
영화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의 한 장면. 사진 출처, The Movie Database.대강절을 앞둔 거리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캐럴이 울려 퍼집니다. 추수감사절의 접시가 채 치워지기도 전에, 상점과 거리 곳곳에서 서둘러 크리스마스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교회들도 분주해집니다. 매년 이맘때, 우리는 늘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이야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삶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장 14절)
그 노래가, 이 잔인하고 불평등한 세상의 시간을 잠시라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쟁과 혐오, 가난과 불안 속에서 지친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숨을 고르고, “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오셨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 속 수신기는 혼자서는 노래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만나야 노래합니다. 서로의 거리 안으로 들어와야, 주파수가 맞아야, 그제야 음악이 울립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꺼이 오셨듯이, 그래서 그분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우리의 삶과 주파수를 맞출 수 있었듯이, 우리의 캐럴도 그렇게 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의 공간으로 기꺼이 들어갈 때, 우리의 노래도 비로소 울리겠지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도 다른 이들의 자리로 걸어갈 수 있기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자신의 집을 찾으셨듯이, 우리도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작은 자리를 내어 받을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만남의 자리마다, 두 개의 수신기가 노래하듯, 작고 연약하지만, 아름다운 멜로디가 울려 퍼지기를. 그곳에, 잠시 머물 수 있는 작은 마을이 세워지기를. 두려움이 아니라 환대로, 배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어진 마을이 세워지기를.
이 기다림의 계절에, 여러분의 삶에도 그런 노래가 울리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대강절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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