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과 죽어감 1부

1. 늙어감

김영일 교수, 사진 제공, 김영일 교수.김영일 교수, 사진 제공, 김영일 교수.

고려말의 유학자 우탁(禹倬)이 인생의 늙음을 한탄하여 쓴 고시조가 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는 길은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1963년 2월 15일 자 나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나는 오늘 방 아랫목에 누워 계신 어머님 옆에 누울 기회를 가졌다. 눈을 감고 계신 어머님의 얼굴을 주시했다. 나는 그토록 가까이 그리고 열심히 어머니를 바라다본 일이 없다. 나는 내심 깜짝 놀랐고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이분이 벌써! 아니 이제는 인생의 황혼길 석양의 길에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으셨을 적 어여쁘셨던 그 얼굴에 이제는 빈틈없이 크고 작은 주름살이 들어섰고, 그래서 쭈글쭈글하며, 머리에는 흰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검은 머리털을 몰아내어 자기들만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어 불쌍하고 가련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처량하시다. 그런 현상은 어머님뿐만이 아니다. 요즘 자주 앓으시는 아버님도 마찬가지시다. 72세인 아버님과 64세인 어머님은 이제 늙으셨다.”

60년 전의 부모님 상황을 20대 청년이던 내가 보고 느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당시 부모님보다도 훨씬 노인이다. 75세 무렵부터 그야말로 늙어감을 생생하게 체감하며, 늘 죽음에 관계된 것을 생각해 왔다. 흔히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표현을 위로와 격려의 차원에서 건네곤 한다. 나 역시 70대 중반까지는 자신 있게 그런 표현에 수긍했다. 그런데 80대를 넘어서고 보니 인생의 무상함이나 쏜살같은 세월이라는 표현을 실감하게 된다. 그뿐일까? 겨울철에 쓸쓸히 내리는 비나 빠르게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면 속절없이 깊은 우수에 젖곤 한다. 이제는 주변을 하나둘씩 정리할 때인 듯하여 못내 서운하다가도 이내 인정하고 수용하는 마음 비우기를 하는데, 그 와중에 결국은 혼자가 되어 슬그머니 스며드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과거의 추억을 하나둘씩 소환하면서 반성도 하고, 뿌듯함도 느껴보는 자아 성찰을 통해 자신과의 속 깊은 대화도 나눈다.

성서의 전도서는 인간의 세상사에는 저항 불가의 우연성, 그리고 선악이나 희비애락의 복합성이 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때’를 자주 언급하는데, 그것은 시간관념이라기보다는 경험 혹은 우연성과 당연성을 가리킨다. 전도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전도서 3:1-2)”라고 말한다.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 중 하나가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은 무엇인가?”이다. 답은 인간이다. 어린 아기는 기어다니고, 성인이 되면 두 발로, 그리고 황혼의 시기가 되면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니까. 인간은 제한된 존재이다. 육체 차원에서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을 겪다가 소멸한다. 그것을 노화 과정, 혹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한다. 노화는 신체의 기능과 구조가 퇴화하여 가는 과정과 현상을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성장하다가 26세쯤부터 노화가 미미하게 진행되고 38세 이후 빠르게 진행된다. 그런데 사람의 뇌는 20대가 지나면서 퇴화가 진행되지만, 60세까지는 뇌의 정보 처리 속도에 별 변화가 없다가 그 이후 노화에 가속이 붙는다고 한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2009)>에서 벤자민 버튼은 80세 외모를 가진 남자아이로 태어난다. 그의 친부는 노인으로 태어난 기이한 아기를 감당할 수 없어 양로원에 맡겨버린다. 그런데 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진다. 노인으로 태어나 젊어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벤자민의 인생은 숱한 우여곡절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외모였을 때 만난 어린 꼬마 아가씨, 데이지와 후에 결혼하고 아이도 낳지만, 벤자민은 점점 젊어지고 데이지는 점점 늙어간다. 평생 시간이 어긋나는 두 사람의 삶이지만, 기회는 두 사람에게 어김없이 주어진다. 그 기회란 ‘삶과 죽음’이다. 웃을 기회, 아파해야 하는 기회, 나눔의 기회, 사랑할 때와 헤어져야 할 때 등이다. 벤자민의 매우 특이한 인생행로에 비추어보면서, 인간의 삶에 관한 질문을 던져본다.

늙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인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은 그저 두렵기만 한 길인가? 늙어가는 것이 두려운 까닭은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삶의 질과 내용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 삶에서 거꾸로든 순행이든 시간의 흐름의 종점은 죽음이다. 그런데 이 죽음이란 영생하는 생명인 조에(Zoe)의 죽음이 아니라 육체적 생명인 바이오(bio)의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2. 늙어감 속의 삶

(1) 착각 속에 산다

82세까지 산 18세기 학자 이익은 노인의 좌절 다섯 가지를 이야기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는다··· 흰 얼굴은 검어지는데 검은 머리는 희어진다 ··· 30년 전 일은 모두 기억해도, 눈앞의 일은 잊어버린다.”

나 자신만큼은 늘 건강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영원할 것 같던 건강은 70대 중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신체 변화를 수시로 느꼈다. 육체적 쇠약함이 조금씩 살금살금 찾아왔다. 정신은 흐릿하고 기억력은 오락가락하여 사물이나 사람 이름들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금방 읽고 들은 것들이 빠르게 휘발된다. 걸음과 행동이 느려지고, 굵은 주름이 하나둘 자리 잡고, 근육과 근력은 조금씩 줄어들고, 눈은 침침해진다, 아주 오래 함부로 사용했다고 조용히 항의하듯 육신의 이곳저곳은 조금씩 고장이 난다. 10여 년 전에는 남자의 특성인 전립선이 비대해져 수술했고, 4년 전에는 허리 협착증 수술도 했지만, 아직도 시원치 않다. 골반이 틀어졌는지 걸음걸이도 절뚝거린다. 5-6번 척추관을 넓히느라 핀을 4개나 삽입했다.

그런데도 마음과 생각은 옛날 젊음 속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늙어가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위험하고 흔한 ‘착각’이다. 종종 이 착각 속에서 방황하는 나를 발견한다. 은퇴 전의 나를 가리키는 다양한 직함, 교수, 교무처장, 학장, 대학원장 등을 떠올리며 거기에 머문 채 상념에 빠진다. 내가 여전히 젊은 줄 알고 나도 모르게 걸음이 무척 빨라져 움찔할 때도 있다. 때론 뛰고 싶고, 등산도 하고 싶다. 골프도 치고 싶다. 스키를 타고 높은 산 위에서 시원하게 활강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휘돌고 싶다. 모두 착각이다. 60대 초에 독일 쪽에서 올라가 알프스산맥을 3박 4일 동안 하이킹했는데, 그와 같은 여행을 한두 번 더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우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라고 전한 요한 기자의 명언을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늙어감이란 부정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노화를 늦추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주기적으로 염색하여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얼굴에 보톡스나 필러 같은 이물질을 넣어서 주름을 숨기려는 이들도 있다.

65세의 원조 로코퀸 배우 앤디 맥다월은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나는 젊어 봤다. 이제 늙고 싶다. 젊어지려고 노력하는 데 지쳤다.”라고 말하고, 나이 듦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유, 노화를 대하는 방식 등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나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을 때 더 행복함을 느낀다. 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회색빛이 되게 두고 나서 행복하게 나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모든 삶의 시기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라면서.

독일 영화 <패러다이스(Paradise, 2023)>는 인간의 남은 수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거나 단축할 수 있는 세상이 나온다. 잔여 수명을 사거나 팔 수 있는 생명공학 회사 예온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오고, 서로 적합 판정하기만 하면, 수혈하듯이 인간의 수명을 돈으로 거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회사의 시간 기증 매니저로 일하는 주인공 막스는 화재로 아파트를 잃는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38년 치의 수명을 담보로 고급 아파트를 산다. 거액의 빚을 해결할 수 없던 아내는 수명 38년을 파는 시간 이식 수술을 받는다. 그 결과 아내는 70대 노인의 몸으로 살게 되었고, 거울에 비친 늙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힘들어한다. 타인의 시간을 강탈하는 자들, 그에 저항하는 아담이라는 단체, 막스와 아내의 갈등 등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고, 엘리나라는 여인은 타인의 수명을 빼앗아 젊어지고 행복을 누리는 쓸쓸한 결말이 인상 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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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와 유전학의 권위자인 하버드대학 교수인 데이비드 싱클레어는 그의 책 <노화의 종말>*1에서 이제 인간의 노화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치료할 수 있고 개선될 수 있으며, 회춘이 가능하다고 언급한다.

앞으로는 일종의 세포 공장이 있어 유전자를 일반 세포에 주입하여 만능 유도 줄기세포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 줄기세포로 동일한 세포를 생산하고, 장기별로 필요한 세포를 만들어 고령화나 퇴행성 질환으로 손상된 장기를 자기 세포로 보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100세 노인에게서 취한 노화 세포로 만능 유도 줄기세포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제는 노화 세포나 조직의 퇴행성을 근원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들 저런들 누가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어쨌든 인간의 나이와 수명은 결국 제한적이며,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젊게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 한다. 나이 들었다고 더 움츠리고 더 구부정해지고 더 의기소침해지기보다는 가슴도 펴고 마음도 펴서 긍정적으로 그리고 순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나이를 정해서 그 나이에 맞게 살아가야 조금이라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예컨대, 지금의 실제 나이가 80이라면 마음의 나이를 65세로 정하고 그 나이에 맞추어 살면 기억력, 청력, 유연성, 자세나 걸음걸이까지 젊어진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태도 혹은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랜마 모제스(Grandma Moses)는 80대에 미술을 시작해서 세계적 예술가로 인정받았고, 작곡가 베르디는 80대에 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오텔로(Othello)’를 작곡했다. 나도 얼마 전부터 스페인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 귀로 들여보내면 금방 다른 귀로 새어 나가버린다. 노년의 시니어에게도 새로운 시작, 도전이 가능하며,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믿는다.

노인(老人)이라는 말의 ‘老’는 이중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노둔老鈍 노후老朽 노욕老慾과 같이 낡아서 고집스럽고 부정적 태도보다는 노련老鍊 노숙老熟 노성老成과 같은 무르익고 경험이 쌓여 형성된 품위 있고 긍정적인 모습이 좋지 않을까?

늙음의 삶 속에는 지혜와 노련함 그리고 품격이 있다. 노인의 삶은 종합이고 총합이다. 늙음에는 천금보다 더 값진 경험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노사연의 노래 중에서 ‘바램’을 좋아한다. 가사 중에 늙어가는 사람에게 적절한 표현이 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대뿐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 자신과의 싸움의 시기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는 인생에서 우리가 치러야 할 세 가지 싸움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의 싸움이고, 둘째는 인간과 또 다른 인간과의 싸움, 그리고 셋째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싸움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빅토르 위고는 인간이 치르는 자신과의 싸움을 그리기 위해 <레미제라블(Le Miserables, 1862)>을 발표해서 인간의 자아 속 두 자아, 즉 선과 악의 내적 갈등을 묘사했다. 물론 그의 의도는 인간 안에 내재하는 선악의 싸움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것을 필자는 자신과의 싸움에 적용해 본다. 왜냐하면, 늙어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도 혹은 몸에 부담이 되더라도 적당한 운동을 한다든지, 성가셔도 부지런히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다시 말해 자기 삶을 통제하고 꾸려가는 일은 육체와 정신 건강을 위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플라톤(Plato)은 “인간 최대의 승리는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늙으면 육체가 쇠약해지고, 여기저기 불편해지며, 정신적 위축감과 단절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고독을 씹으며 살아야 한다. 처한 환경이나 기질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자녀에게 기대고 바라는 정도에 비례해서 실망감도 크리라 생각한다.

과거의 시간과 공간에 집착하고 거기에서 빠져나오기를 꺼리거나 탈출하지 못한 채 지난 시절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대두된다.

영화 <더 파더(The Father, 2021)>의 핵심 화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영국 런던의 아파트라는 공간에 사는 괴팍스럽고 고집불통의 80대 꼰대 아버지, 그래서 자신을 돌보는 간병인에게 욕설을 내뱉고 불친절하여 자주 내쫓고 딸과 끊임없이 불화하는 노인이 주인공이다. 노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데, 자주 창밖을 내다보면서 시계와 아파트 공간에 집착한다. 그의 삶은 혼란스러움의 연속이고,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뒤엉킨 카오스 시간이다. 알고 보니 그는 알츠하이머성 치매 환자였다.

늙어가면서 심각한 환자가 아닌데도, 사회활동이나 야외 활동을 하지 않고 움츠리고 생활하는 이들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포로인 셈이다. 사회 단절이나 귀찮음으로 집 안에 갇혀 살아가는 것은 정신 건강이나 육체 건강에 좋지 않은 태도이다. 이는 삶의 포기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도전이 필요하다. 내가 ‘나’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잔여 여생을 이렇게 주저앉아서 맞이할 것인가? 아니다. 여기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하다. 적극 미래로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끈을 동원해야 한다.

(3) 마음 비우기(Emptying)

여든에 이르는 긴 생을 살아보니 희로애락을 대표하는 수백만 장의 삶의 기록 사진들이 파일에 저장되어 있다. 60대 후반부터인가 나의 인생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모든 것이 종합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섬기던 대학교의 총장 선거에서 낙선한 결과로 한때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의롭지 않게 진행된 선거 과정을 묵과하시고 불의가 승리하게 허락하실까 하는 회의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 사진함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은 아침의 사진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한 사진은 석양빛을 담은 사진이라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다. 나이 듦에 따라 경험과 지식과 연륜이 쌓이고, 여유와 관대함, 묵직함이 더해지며, 인격도 성숙해진다. 모든 것이 무르익어지고 종합되는 형태일 수도 있다. 마음속에 무언가로 가득 채워진 상태라고나 할까?

사진함은 나의 상처를 치유함과 동시에 오히려 감사함의 삶으로 바뀌게 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비우기의 삶”을 좌우명으로 살아왔다. 나에게 속해왔으나 별 쓸모가 없는 것들과 마음과 생각의 구석에 쌓여 있는 쓰레기(욕심, 자랑, 착각, 미움, 이기주의)들을 하나씩 버리는 일을 시작했다. 비움(emptying)은 봉사와 나눔, 그리고 자기희생으로 이어졌다. 즉, 비움의 삶이란 자신을 조금씩 쪼개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사회에 환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초기에는 자신과의 싸움의 현상이 빚어질 수도 있다. 늙음의 틀–욕심과 집념, 포기와 단념, 절망과 불안, 게으름과 무관심의 틀-에 갇혀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그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비움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비움을 더 높은 차원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나눔과 자기희생적 봉사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럴 때 마음이 비워져서 허전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 반대다. 기쁨과 스트레스가 없는 청명한 날이 계속된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임종했을 때 의자와 식탁, 숟가락, 포크, 접시 하나씩만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초대 기독교 시대의 바울(Paul)은 빌립보서 3:8 하반 절에 “배설물(refus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For His sake I have thrown everything away; I consider it all as mere garbage/refuse, so that I may gain Christ.)”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쓰레기, 즉 욕심, 미움, 질투, 자만심, 근심, 걱정 등 내 삶 속에 있는 못된 것들, 더러운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린 후, 마음을 비운 그 자리에 예수를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진정한 비움의 삶이 되지 않을까? (2부에서 계속)

  1. 노화의 종말: 하버드 의대 수명혁명 프로젝트, 데이비드 싱클레어 지음, 이한음역. 원서: Lifespan: The Revolutionary Science of Why We Age and Why We Don’t Have to, David A. Sinclair, Simon & Schust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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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과 죽어감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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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감리교인들도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까?

만인성도주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연합감리교회에서는 11월 1일 <만인성도일(All Saints Day)> 또는 11월 첫 주일을 <만인성도주일>로 지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왜 연합감리교인들이 추모 예배를 드리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지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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