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 글은 알라바마주 프렛빌에서 프렛빌한인교회를 개척해서 섬기고 있는 홍성국 목사가 지난 한인총회에서 설교한 내용이다.
고린도후서 5:13-16
한국에서는 연말이 되면 다음 해를 전망하고, 흐름을 예상하는 ‘트렌드 코리아’라는 책이 출간됩니다.
올 2019년 예상 키워드는 ‘돼지띠 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PIGGY DREAM이었습니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올해를 분석한 큰 흐름을 ‘시대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정체성과 자기 컨셉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0개의 트렌드 키워드 중 9번째가 A로 시작하는 ‘As Being Myself’ 입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영화로 나왔던 ‘라라랜드’를 인용한, ‘나나랜드’라는 표현을 써서 트렌드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단점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타인의 우월한 모습을 봐도 자기 비하나 한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나랜드는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착하는 기회의 땅입니다.
BTS를 아시나요?
요즘 제 딸이 BTS에 푹 빠져 살아 저도 관심이 있습니다. BTS가 작년부터 유니세프와 함께 ‘Love Myself’ 캠페인을 벌이면서 타인의 시선을 중요시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감을 중시하는 모습을 통해 전 세계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교회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찾아가는 여정이 없으면 세상의 관심사에 묻혀버리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전에는 사람들이 종교적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무신론자가 많아졌습니다. 탈교회현상도 빨라지고, 종교 문제에 대해 아예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에 많이 오염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시대적인 환경 변화에 너무 적응을 잘하다 보니, 교회가 세상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오히려 교단과 리더십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애쓰는 교인들을 볼모로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컨트롤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버트 쉬나이즈 감독은 그의 책 ‘열매 맺는 회중의 5가지 실천’(Five Practices of Fruitful Congregations)에서 “교회가 내부적인 것을 운영하는 일에 우선하여, 초점을 맞추거나 교회 자체가 서바이벌하기 위해, 교회에 속한 성도들 관리에만 신경을 쓸 경우 교회의 영적 활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선교와 봉사’를 열매 맺는 실천의 한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성도들의 역동성을 만들어주는 믿음의 실천요소들로 극진한 환영과 열정적인 예배, 의도적인 교육, 아낌없이 내어드리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들이 교회 안을 강화하는 일이라면 ‘위험을 감수하는 선교와 봉사’는 교회 밖 세상을 향한 담대한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Risk-taking)은 교회가 아마존 정글이나 모슬렘 지역 같은 위험한 곳으로 선교하러 가라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안전지(Comfort zone)를 벗어나는 일들을 시도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가 되는 자리에 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뿐만 아니라 교회도 담대히 한걸음 내디딜 때, 분명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성도 수가 좀 적어도 세상을 향한 일에 열심을 내고,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큼 집중해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미쳤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눈에는 사도 바울이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전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무리 없이 잘 지냈는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떠난 후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고린도에 서 있던 하나님의 교회가 바른 신앙에서 떠나게 되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분명히 전해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울도 그들에게 좋은 소리만 하며, 이전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고, 주님과 함께하는 자로 더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삶이 아닌, 때로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역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도 목회하면서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주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흔히 이야기하는 Triple A형입니다.
세심하기도 하지만 소심한 면이 많아, 안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사실 겁도 많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굉장히 꺼려, 해보지 않았던 일을 처음 하게 되면 걱정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분명 그 삶이 변합니다.
처음 아이티 선교를 하러 갈 때도 그랬고, 교회 개척을 결심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왜 그렇게 첫걸음을 떼기가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아이티에 교인들과 갔을 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지만, 낮에는 아이들에게서 세균이 옮으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밤에는 동네에서 빈번하게 들리는 총소리에 가슴이 뛰기도 했습니다.
이 나이에 교회를 개척했다가 혹 이전에 섬겼던 교회나 기도해 주시는 분들에게 실망을 주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제 수준이 그렇습니다.
많은 분은 그런 일들을 ‘뭐, 별것도 아닌데..’하고 생각하겠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어쩌면, 저 스스로에게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내 삶의 테두리에서 늘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알수록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가 하나님 앞에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 일에 더 미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안에 새로운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 사람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모두 그리고 모든 것에 미쳐갑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등 자기 생각과 행동에만 골몰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생명과 평화에 대한 생각과 배려는 담 너머 이웃집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별것 아닌 것 같은 노래에 전 세계가 열광하고, 종일 인터넷에, 게임기에, 휴대전화에 몰두하고, 어딘가에 정신이 팔릴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를 살며, 어딘가에 미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쳤다는 게 제정신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지만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것만을 생각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골프나 휴식을 포기하고 주일날 교회 나오겠습니까? 우리 지역은 특별히 그렇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힘들게 번 돈을 그렇게 기꺼이 헌금하고, 시간을 희생하며 사람들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그 좋은 세상의 성공 신화를 다 포기하고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교사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미쳤다는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장 앞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은 미래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영원한 집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미래에 두 발을 딛고, 거꾸로 현재를 내려다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현재에 두 발을 딛고 미래를 꿈꾸면서 ‘오늘 열심히 살아야 행복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돈, 명예, 권세를 떠나, 이제 곧 영원한 집에 들어갈 사람이 오늘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는 미래로부터 소급해서 현재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8절에 ‘우리가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를 보면, 지금 바울은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겁니다.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아니까요. 사도바울도 시대를 초월해 자신만의 나나랜드에 살고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시대와 관습을 초월하고, 자기만의 컨셉을 분명히 가지고 사니까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도바울에게 미쳤다고 말한 겁니다.
사도 바울이 너무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래, 미쳤다! 너희가 어쩔 건데… 내가 미치기는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미친 거다.”
예수님의 사랑이 강권하니까 이제부터 ‘나를 위한 삶은 더는 있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로 어떤 상황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꿀 만큼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귀중한 시간을 오히려 복음 전하는 데 썼습니다.
결국 베스도 총독으로부터 ‘네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하더니 미쳤구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바울이 당당하게 ‘이렇게 결박당한 것 말고는 저처럼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왕에게 말합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바울은 어떻게 이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유니버설스튜디오나 식스플래그에 가면, 보기와는 다르게 롤러코스터 타는 걸 참 좋아합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타기를 주저하지만, 안전벨트가 나를 잘 붙잡아 줄 것을 믿기 때문에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두 손을 번쩍 들고 괴성을 지르며, 그 순간을 즐기게 됩니다.
바울에게도 절대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안전벨트가 있었던 겁니다.
새로운 도전이 생길 때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때마다, 주춤거리는 그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다시 확인하게 되면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던 겁니다.
나와 나가 아닌 하나님과 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 자신에 자존감이 생기는 기회의 땅! 부족하지만 주눅 들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나나랜드! 이것이 올해 저와 여러분의 트렌드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실 한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만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을 위해서 살겠다, 그런 큰마음도 없었고, 그냥 나름대로 학위 하나 받아서 가르치면서 소위 잘난 맛에 살아가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생각을 깨시려고 저를 미국으로 보내셨나 봅니다.
영어로 공부하는 게 그렇게 힘든 줄 알았다면, 저는 미국 안 왔을 겁니다.
토플 시험을 보고는 왔지만, 대학원 강의실에 앉으니까 수업이 하나도 안 들렸습니다.
그렇게 무려 3년 이상을 강의실에 그냥 앉아만 있었습니다. 룸메이트가 밤에 책상에 불 켜놓는 게 방해가 된다 해서 밤새 라운지에 나가 강의 녹음테이프를 수도 없이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보스톤에 하나님을 모르는 유학생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마음의 부담이 되어, 1시간 거리였던 보스톤 대학교에 일주일에 2-3번 나가 캠퍼스 사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사역도 많았고, 학비도 벌어야 했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전도한답시고 기타케이스 들고, 오버헤드프로젝트 들고, 에어컨도 안 나오는 차를 타고 창문을 연 채로 하이웨이를 달려갈 때, 저는 그게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저보고 ‘너 제정신이냐?’고 했습니다.
10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아틀란타에 살 때,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많은 곳 중 하나님께서는 제가 제일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서부 LA로 가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당시 아내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고, 저도 풀타임으로 사역하고 있을 때였지만, 아내와 함께 기도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떠나려고 결정했습니다.
목회하는 친구들이 다 “왜 거기에 가려고 하냐?”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LA 사역에서 열심히 사역하던 어느 날, 갑자기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 한 달을 입원해 정말 죽다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그때 개척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몽고메리 알라바마에 사시는 몇 분들과 연결이 되었고, 아내가 둘째 아이 출산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몽고메리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몸으로 할 수 있겠냐고 걱정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교회에서 10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마음은 자꾸 인근 프렛빌 지역을 향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개척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쫓겨난 거 아니면 굳이 이렇게 힘든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하겠냐고 수군거렸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인교회가 없는 그 도시에 제 마음이 향했고, 이 일이 기뻤기 때문에 그로부터 2년 후 또다시 교회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미친 짓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목회자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뭔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주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삶! 별다른 성과는 없는 것 같아도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맡겨진 사역을 신실하게 하는 삶!
‘너를 위하여 대신 죽은 나를 위해 너도 한 번 그렇게 살아보지 않겠니?’
그게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요청하시는 사명입니다.
윌리엄 보든(William Bord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800년대 말 그는 억만장자였고, 예일과 프린스톤에서 공부한 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소원했고, 그가 받은 엄청난 유산을 다 포기하고 이슬람 땅으로 가기 위해 이집트에 언어 배우러 갔다가 척수막염에 걸려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교지는 구경도 못 하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무모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인생을 낭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성경책에서 6개 단어가 발견되었습니다.
No Reserves!(남김 없이!) No Retreats!(후퇴 없이!) No Regrets!(후회 없이!)
내가 가진 것 남겨두지 않겠다! 뒤돌아보고 후퇴하지 않겠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겠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 교회!
뒤돌아보고 후퇴하지 않는 담대한 교회!
주님의 제자로 살면서 주와 함께 하는 삶이 무모하다고 후회하지 않고 계속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교회, 그런 연합감리교회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와 함께라면 위험도 즐겁습니다!
홍성국 목사는 알라바마주 프렛빌에서 프렛빌한인교회를 개척하고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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