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2024년 10월 7일 한인총회 개회 예배에서 ‘은혜의 첫 자리’를 기억하며, 올해 새롭게 파송 받았거나, 안수받은 목회자와 새로운 목회지로 파송을 받은 이들이 말씀을 전했다. 그중 하나인 조은별 목사는 2024년 북텍사스 연회에서 준목사(Provisional Elder)로 파송을 받았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안녕하세요! 텍사스에서 온 굿스타, 조은별 목사입니다. 저는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8월에 댈러스에 왔고, 지난해에 남감리교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퍼킨스(Perkins)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M.Div) 과정을 마쳤습니다. 올해 6월 북텍사스 연회(North Texas Conference)에서 준목사(Provisional Elder)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아직 목사라 불리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한인총회도 처음 참석하기 때문에 배워갈 게 많은 새내기 목사입니다.
한국에서의 삶부터 미국에 와서 파송을 받아 목사로 사역하는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이 결코 제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기에, 저의 소명을 가장 사랑하는 말씀인 고린도전서 15:10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올해 총회 주제가 “다시 은혜 앞으로”인 만큼, ‘다시‘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두 가지가 나오는데요, 하나는 “이전의 상태나 행동을 되풀이하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방법이나 방향을 달리 고쳐서 새롭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삶을 살아내는데 바쁘고, 사역에 집중하느라 잊을 때가 많은 제가 이 시간 나누고 싶은 은혜는 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처음 저를 만나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기억하고, 둘째,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와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저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매 순간 함께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주 잊어버리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이 은혜의 감동을 다시 기억하고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높임 받으시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릴 적 저는 어렵게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목회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사춘기 소녀의 눈에 비친 제 부모님의 삶은 세상의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종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전혀 유익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밖에 없는 오빠마저 아버지가 존경스럽다며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했으니, 저라도 돈을 많이 벌어, 힘든 길을 걸을 두 목사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랐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대형 교회에서 부흥 집회가 있다는 소식에, 큰 집회를 목말라하던 저는 “엄마에게 나 좀 다녀올게.”하고 가봤습니다. 그곳에서 제 맘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제 또래 아이들이 찬양팀을 이뤄 특별찬양을 준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아! 나도 이런 큰 교회에 다녔더라면, 또래 모임도 하고, 이것저것 악기도 많이 배우고, 선교 간다는 핑계로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을 텐데, 아빠 때문에! 작은 교회 목사인 아빠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됐다.’라는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설교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기도 시간이 되자 저는 울부짖으며 오직 한 가지 기도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부러워 죽겠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랑하는 내 딸 은별아, 교회가 크다고 저들이 큰 것이 아니란다. 또 교회가 작다고 그들이 작은 게 아니란다. 나와 내 교회를 사랑과 헌신으로 섬기는 너의 부모는 내게 정말 소중한 이들이란다. 내가 그들로 참 기쁘단다.”
그 순간, 제 모든 생각과 마음, 그리고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던 제 부모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그 뒤로 저는 부모님을 존경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사랑에 푹 빠져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혼자 하던 큐티 책 뒤에 실린 학교나 교회에서의 큐티 모임 사진을 보면서, 살짝 부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그런 모임을 기대할 수 없었고, 또 제일 바쁜 시기인 고3 때 그런 걸 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제 부모님은 새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제가 좋은 친구들과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웬일인지 그해에는 제가 하나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야자, 야간 자율 학습 때문에 저녁 9시까지 학교에 머물러야 할 때, 급식이 너무 맛없어서, 아버지께서 항상 도시락을 싸다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쁜 도시락 아니고요, 매일 같은 메뉴로 한입에 먹기 쉽게 김으로 돌돌 말은 김치볶음밥과 계란국이었습니다. 쟁반째 저녁 시간에 맞춰 배달되었습니다. 비록 투박한 도시락이었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식사였습니다. 게다가 그 도시락을 저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차마 급식을 피하지 못했던 친구들도 좋아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그 친구들을 위해 항상 두 배로 김치볶음김밥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친구 세 명과 교회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친구 2명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은 많이 참해졌는데요, 여고생 시절에는 한 왈가닥했거든요. 그런 제가 교회를 다니지 않던 친구들에게 제가 경험한 교회 이야기와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면, 그들은 정말 재미있어했어요. 그렇게 매일 저녁,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능 100일 전쯤 다시 야간 자율 학습을 위해 제 자리에 앉는 순간, 마음속에 이제는 때가 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시간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에게 이제 우리 단순히 교회 이야기만 할 게 아니라 함께 큐티를 해보지 않겠냐고 물어봤고, 모두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께 큐티 책 5권만 후원해달라 요청한 후, 매일 저녁을 빠르게 먹고 계단이나 빈 교실을 돌아다니며 큐티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 큐티 모임을 사모하던 친구들이 한두 명씩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게 열두 제자처럼 한 열 명 정도 모였을 때, 우리는 모임을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홍보부장, 찬양부장, 소그룹부장 등 역할을 분배해 시작했더니, 어느새 전교에서 60여 명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리더가 되었습니다. 저희는 매일 저녁 시간 40분 중 20분 동안 모여 무반주로 찬양하고 기도했으며, 그 시간이 부족해 0교시와 1교시 사이에 20분 동안 함께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말씀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알게 모르게, 목회자 자녀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저와 같은 목회자 자녀들을 위해 쓰임 받고 싶다는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나 가정에서 상처받고, 목회자 자녀로 태어난 것이 큰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쓰임 받고 싶다는 비전을 가지고, 감리교 신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이 땅의 복음을 위해 걸어온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뻐 학교생활을 나름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비전을 목회자 자녀를 넘어 목회자 사모님들과 교회의 여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회복하도록 돕는 더 큰 비전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감신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모두 졸업했지만, 목사가 되는 것, 특히 한국에서 여자으로서 목사가 되는 것에 대해 많은 걱정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스크랜턴여성지도자센터>를 통해 세계적인 리더쉽을 배우고 나서, 자신의 달란트에 따라 쓰임 받는 여성 목회자들을 보면서, 저도 연합감리교회에서 제 달란트에 맞게 쓰임 받는 목회자가 되는 것도 좋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가 유학을 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유학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저와 한 살 터울인 오빠가 남감리교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 입학하고는 저를 불렀습니다.
한국에 남아 오빠를 후원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다시금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면서, 준비한 지 한 달 만에 입학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장학금이었는데, 제가 뭐 대단히 잘난 것도 아니고, 급하게 준비했던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장학금을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아마 본인의 주머니에서는 나올 것이 없으니, 하늘 아버지의 주머니를 열어 달라고 더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오빠랑 저 모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둘이 생존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 하고, 교회 사역까지 병행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언어 장벽을 극복하기도 쉽지 않아서, 대문자 E(편집자 주: MBTI의 E는 외향적 또는 적극적 성격을 의미한다.)인 제가 I(편집자 주: MBTI의 I는 내향적 또는 소극적 성격을 의미한다.)가 되어가는 과정을 겪어야 했고, 특히 작년엔 준목사 인터뷰 과정이 너무 버거워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섬기던 모교회(home church)가 교단을 탈퇴하는 바람에, 제 안수 과정을 함께해줄 교회를 찾아야 했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면서 안수 과정을 위한 논문 작성까지 해내는 일이 너무 벅찼지만, 오빠와 함께 서로 “조금만 힘내자, 이것만 끝내보자.”하며, 서로 거의 멱살 잡고, 서로를 붙들어 주며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 진짜 멱살을 잡은 건 아니고요. 많은 분이 저희 연회에서 안수받는 게 힘들 거라 말씀했지만, 저희는 그 과정을 정말 힘겹게 이겨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는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꼭 목사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목사로 필요하시면 불러주시고, 아니면 다른 일 할게요.”라고 좀 뻔뻔하게 기도했어요. 저는 그리고 때에 맞게 보내주신 도움의 손길을 통해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감사하게도 안수 과정이 미뤄졌던 오빠와, 생각지도 못하게 빨라진 제가 북텍사스 연회 최초로 남매가 함께 준목사로 파송을 받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제가 저를 소개할 때, “텍사스에서 온 굿스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정체성을, ‘good star for good news(복음을 위한 좋은 별)’이라고 저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자녀로 태어났고, 조 씨 아버지를 둔 덕에 조은별이 되었음에도, 저는 항상 ‘나는 나쁜 별이야, 보잘것없는 별이야, 왜 금별이 아니고 은별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난 후 저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좋은 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 이 땅에서의 나의 모든 수고도 나 힘이 아닌 매 순간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저는 아직 미국에서 지낸 시간이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곳에 더 오랜 시간 동안 이와 같은 일들, 아니 더 힘든 일들을 겪으신 분들이 있으신 줄 압니다.
삶이 버거워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을 때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 다하기 위해,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신 여러분의 수고를 하나님이 다 아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삶에서, 여러분의 각 교회에서, 힘들었던 모든 순간 속에서, 늘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시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목사로서, 평신도 리더로서, 부르셨던 그때를 다시 기억하며, 나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시금 나의 모습을 재정비하고 하나님께 나아오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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