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글은 도은배 목사가 교인들이 제출한 질문에 대답하는 “Ask Your Pastor” 설교 시리즈 3편이다.)
우리 교회에는 장수의 축복을 누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90세 이상 되시는 5분의 교우들이 함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인 론(Ron)은 70세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였고 아직도 저와 가끔 골프를 칩니다. 50대인 저는 90이 넘은 그를 이기기 위해 매번 진땀을 흘려야 합니다.
매 주일 가족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고 좋아하는 운동도 하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인생, 참으로 멋진 인생입니다. 이런 멋진 인생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오늘 여러분께서 제게 주신 질문 중 하나인 “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토록 오래 살았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멋진 인생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창세기 5장은 첫 인류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10세대에 이르는 족보입니다. 이 기록을 보며 누구나 놀라게 되는 것은 그들의 나이입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 5:4-11)
평균연령이 900세에 이르는 이들에 비하면 우리의 나이는 아무리 많다고 해도 어린아이의 연령에 불과합니다. 의학기술의 도움도 없던 시절에 그들은 어떻게 저리 오래 살았을까요?
이들의 장수 비결에 대해 지대한 호기심을 갖고 나름대로 대답을 찾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초기 인류의 채식 위주의 식단이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당시에는 바이러스나 질병이 적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자연환경을 근거로 들기도 합니다.
한가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문자조차 없던 고대에 관한 후세의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증명할 수가 없기에 창세기에 기록된 이들의 수명을 사실로 규정하고 그 대답을 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그들이 어떻게 그리 오래 살았는지가 아니라 이 족보를 통해 창세기의 저자가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 그 동기와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조상을 미화, 혹은 영웅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창세기 5장의 족보가 고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고대문명에 수백, 수천 년씩 살았다고 기록된 수메리안 왕들을 의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설적 수명을 누렸던 조상들의 영웅적 서사를 통해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스갯소리 하나 하겠습니다.
한동네에 사는 꼬마 아이들이 서로 아빠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아이는 자기 아빠가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어마어마한 돈을 번다고 자랑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고위직 공무원이라서 동네에서 힘이 세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아이가 말하기를 자기 아빠는 친구들의 아빠들이 낸 돈을 말 몇 마디로 모두 가져간다고 했습니다. 목사 아들이었습니다.
웃자고 만들어진 농담이지만, 자식은 누구나 자기 아빠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입니다. 조상과 선조들의 업적을 과장하고 심지어 역사를 날조하는 일은 고대사회는 물론 요즘 같은 문명사회에서도 흔한 일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5장에 등장하는 인류들이 왜 그토록 오래 살았는지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나름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몇 가지 성경 본문이 있습니다. 그 중의 첫 번째는 창세기 1장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첫 번째 주신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생육과 번성이라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나긴 수명이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130세에 아들 셋을 낳고 800년을 더 살며 자식을 낳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이 낳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세기 5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오래 살았던 이유는 생육과 번성이라고 하는 지상 명령과 관련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왜 우리는 그들처럼 오래 살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치 않으시는 걸까요?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창세기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1-3)
이 구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요지는 인류가 번성하며 사람들이 제멋대로 배우자들을 선택하기 시작했고 이에 깊이 절망하신 하나님은 인류의 수명을 120으로 대폭 줄이셨다는 겁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지상에서 쓸어버리기로 결심하시고 노아에게 홍수에 대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홍수 이후로 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의 수명이 줄어든 것이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수명 단축은 하나님의 위대한 결정이요 인류에게 주신 커다란 축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푸틴 같은 사람들이 900년씩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쟁과 광기로 가득 찬 세상, 개인과 특정 집단의 이익과 정치적 야욕으로 인해 힘없고 무고한 생명에 대한 살상이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서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순간 같을 뿐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시 90:3-5)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남은 날 수를 계산하는 지혜를 구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공평합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힘 있는 자나 힘없는 자나 주님께서 이제 그만 돌아가라 하시면 가진 것 모두 내려놓고 그냥 떠나야 합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건강과 장수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몸소 보여주신 삶은 단순히 무병장수의 인생이 아닙니다.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으로 알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거듭 강조하셨던 늘 깨어 있는 삶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분명 큰 축복이지만 정반대의 삶을 살았어도 멋진 인생을 살아간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30여 년의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그 누구보다 강렬하고 위대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대지 위에 아낌없이 쏟아붓고 가신 그 분은 한 줌의 미련도 남기지 않는 삶을 사셨습니다. 가족도 집도 재산도 없이 떠돌이 인생으로 살다가 인생 말년에 빌립보 감옥에 갇혀 써 내려간 바울의 옥중서신은 온통 기쁨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지난달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뵙고 왔습니다. 90이 넘으신 저의 부모님께서는 안타깝게도 건강이 좋지 못하십니다. 50년 목회를 하시고 은퇴하신 아버님은 거동을 못 하시고 그런 아버님을 홀로 보살피는 어머님은 치매로 가끔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두 분을 요양시설로 모시기를 간절히 원하였으나 본인들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날 갑자기 기억력이 좋아지신 어머니는 제게 또렷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저와 제 가족과 제 목회를 위해 매일 기도하신다고.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도 아직도 자식을 위한 기도의 끈을 붙잡고 계신 어머님은 아직도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삶을 살고 계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국의 어느 시인 (안도현)의 시를 여러분과 나누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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