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祖國)을 찾아 헤맨 경계인,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작년 이맘때로 기억한다.

취재차 한국을 방문해 머물던 중 친구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로 받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 감리교 목사 가족의 이야기라는 설명과 함께였다.

책은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쓴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이었다.

기자라는 직업은 언제 어디서든 대기 상태로 생생한 뉴스를 좇게 만든다. 취재와 기사 작성이라는, 촌각을 다투는 일에 매몰되어 지내다 보면 책 한 권을 차분하게 읽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나마 시간이 나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운동을 하거나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흘려보내곤 한다.

또 하나 변명을 보태자면 친구가 선물한 책의 진입 장벽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처음 세 장을 읽는 데 적지 않은 인내가 필요했다. 수많은 인물과 온갖 사건,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복잡다단한 계보가 이어지면서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4장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속도가 붙었다.

비로소 한 인간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삶을 한줄 한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역사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리저리 떠밀리고 끝내 부서져 간 한 인간과 그 가족의 비극적 삶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생생하게 듣는 듯했다.

책을 다 읽은 날, 이 책을 선물한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그대가 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오늘에야 완독했네. 명치 끝이 저리네. 조국(祖國)의 의미를 이 나이에 새삼 되새김질하고 또 하네.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삶이 깔리고 스러졌을지를 생각하니 입안이 너무 까끌까끌하다네.”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현앨리스가 감리교 목사 가족이니 형이라면 우리가 읽는 것과는 또 다른 뭔가를 읽어내지 않을까 했어요.”

그 친구의 말이 맞았다.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의

현앨리스, 한국 이름 현미옥은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현순(玄楯, 1880년 2월 28일 ~ 1968년 7월 11일)의 맏딸이다.

현순 목사는 정동제일교회와 상동교회에서 목회했으며, 1919년 3·1운동 직전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3·1운동의 발발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 알리고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한 독립운동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23년부터 1926년까지 하와이 한인감리교회에서, 1926년부터 1940년까지 카우아이섬에서 목회한 뒤 은퇴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현 목사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196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975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감리교 목회자인 내가 이 책을 읽은 또 다른 수확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감리교인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현순 목사와 그의 가족을 따라가다 보면 초기 재미 한인 사회에서 감리교회와 감리교인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데 그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곳곳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던진 현순 목사가 노년에 지켜봐야 했던 가족의 참혹한 운명은 이 책을 읽어가던 나에게조차 힘겨웠다.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은 독립했지만, 그 조국은 현순 목사 가족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맏딸 앨리스는 북한에서 미국의 스파이로 몰려 사라졌고, 외손자 정웰링턴은 체코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독립된 조국을 꿈꾸었던 아버지가 자식과 손주의 비극을 지켜보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사실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한국의 마타하리’아니었다

현앨리스는 1903년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최초의 한국인으로 알려진 그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성장했다. 이화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전에 다니던 중 아버지가 상하이로 망명하자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1919년 3·1운동이 분출시킨 민족적 에너지와 상하이 독립운동 진영에서 확산되던 사회주의와 혁명 사상을 접했다. 박헌영, 김단야를 비롯한 젊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고, 이후 하와이 노동운동과 재미 한인 진보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훗날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것은 독립운동도, 재미 한인 사회에서의 활동도 아니었다.

‘박헌영의 첫 애인.’

‘미국의 스파이.’

심지어 ‘한국판 마타하리.’

1955년 북한의 김일성이 정치적 경쟁자였던 박헌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현앨리스는 미국 정보기관의 첩자로 등장한다. 북한은 그녀가 박헌영의 옛 애인이고, 미국 정보기관을 위해 박헌영을 포섭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남한의 일부 언론도 훗날 이 이야기를 받아 현앨리스를 ‘한국판 마타하리’로 소개했다.

그러나 정병준 교수의 오랜 추적은 그 선정적인 이야기에 균열을 낸다.

정 교수는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체코 프라하 등에 흩어진 문서와 자료를 찾아 현앨리스와 그의 가족을 추적했다. 특히 1921년 겨울 상하이에서 박헌영과 현앨리스, 현피터, 주세죽 등이 함께 찍은 사진의 실체를 확인하면서 이들의 관계를 복원해 나갔다.

그 결과 드러난 현앨리스는 ‘마타하리’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헌영과 현앨리스는 상하이 시절 독립운동의 꿈을 공유한 젊은 동지에 가까웠다.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곧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그럼에도 수십 년 전의 인연은 20세기 냉전 시기와 무자비한 권력 투쟁 속에서 ‘간첩 관계’로 다시 만들어졌다.

역사는 때로 한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가보다 그 인간에게 어떤 이름을 붙였는가를 더 오래 기억한다.

그렇게 현앨리스에게 붙여진 이름이 바로 ‘스파이’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사람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현앨리스의 정치적 이념이 아니었다.

그녀가 평생 어디엔가 속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고, 내내 거부당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현앨리스는 미국 시민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미국인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성장했지만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했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미군정은 그녀를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바라보았다.

1945년 말 현앨리스는 미군정 민간통신검열단의 부책임자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박헌영 등 옛 동지들과 접촉하고, 주한미군 내 공산주의자들과 이들을 연결했다는 이유로 미군 방첩 기관의 감시 대상이 됐다. 결국 그녀는 한국에서 추방됐다.

그 뒤 미국에서 진보적인 재미 한인들과 활동하던 현앨리스는 마침내 중대한 선택을 한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북한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그녀에게 당시 북한은 단순히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던 듯하다. 상하이 시절 함께 독립을 꿈꾸며 활동한 옛 동지들이 있는 곳이고, 식민지 조선도 미국도 아닌, 자신이 진정한 조선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 ‘사상의 고향’이었다.

1949년 프라하를 거쳐 평양에 들어간 그녀는 ‘앨리스’ 대신 자신의 한국 이름인 ‘현미옥’을 사용했다.

그 작은 선택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쩌면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이상향이라고 믿은 그곳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몇 년 뒤 북한은 그녀를 ‘현미옥’이 아니라 다시 ‘현앨리스’라고 불렀다. 그녀가 선택한 조선인의 정체성 대신 미국인이라는 출신이 다시 소환됐고, 결국 그녀는 ‘미 제국주의의 고용 간첩’으로 규정됐다.

그녀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묘비조차 없다.

개인을 산산조각 역사

정병준 교수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힘을 ‘거대한 자기장’에 비유한다. 그 힘이 한반도를 터전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책받침 위의 쇳가루처럼 재배치했고, 두 힘이 충돌하는 경계에 서 있던 현앨리스는 결국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이다.

그 비유를 읽으며 책의 부제가 왜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인지 이해하게 됐다.

현앨리스는 일본의 눈에는 위험한 좌익 혁명 분자였고, 미군정에는 공산주의자들과 소통하는 위험한 존재였으며, 북한에서는 미국의 스파이였다.

어디에서도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현앨리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단순히 시대의 희생자로만 보는 것도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수동적으로 역사에 끌려다닌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고, 때로는 무모할 만큼 자신의 신념을 따라 움직였다. 가족과 헤어졌고, 국경을 넘었고, 시민권마저 포기했다.

현앨리스의 선택 가운데에는 오늘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특히 현실의 북한 사회주의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북한을 이상화한 판단에는 그녀의 정치적 낭만주의와 시대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 때문에 그녀의 비극은 더욱 깊어진다.

그녀는 조국을 찾으려 했고, 자신이 믿는 더 나은 세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선택의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국도 이상향도 아니었다.

아들에게까지 이어진 경계인의 비극

비극은 현앨리스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 정웰링턴의 삶은 어머니의 운명이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현앨리스는 일본 유학 시절 정준과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했다. 당시 임신 중이던 그녀는 하와이로 건너가 홀로 아들 웰링턴을 낳았다. 외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웰링턴은 훗날 체코로 건너가 어려움 끝에 외과의사가 됐다.

그 역시 한때 어머니가 있는 북한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북한은 ‘미국 스파이’로 몰린 현앨리스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외삼촌들의 공산주의 및 간첩 혐의와 관련해 그의 행적을 추적했다. 체코 당국 역시 그의 편지를 가로채고 그를 감시했다.

어머니가 미국과 북한 사이의 경계인이었다면 아들은 냉전의 또 다른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1963년, 정웰링턴은 체코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현앨리스의 정치적 선택에 동의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이 대목에서 나는 한 가족에게 역사가 요구한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디아스포라인 나에게 던져진 질문

이 책이 내게 유난히 개인적으로 다가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온 재미 한인이자 코리안 디아스포라다.

물론 내가 살아온 시대와 현앨리스가 살았던 시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내가 경험한 이민의 삶을 그의 비극적인 삶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도 없다.

그러나 국적과 고향, 시민권과 정체성이 반드시 하나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감각만큼은 내게도 낯설지 않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면서도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끊임없이 바라보게 되고, 한국에 가면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어느 순간 내가 예전의 그 한국 사람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런 나에게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면서까지 북한으로 향했던 현앨리스의 선택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조국(祖國)’이라는 단어 앞에서 여러 번 멈춰 섰다.

그녀는 그곳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현앨리스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조국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

조국은 어디인가.

태어난 곳인가.

시민권을 가진 나라인가.

자신이 선택한 나라인가.

아니면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곳인가.

현앨리스에게 조국은 단순한 영토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상이었고, 독립운동가의 딸로 성장한 그녀가 평생 완성하고 싶었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녀는 조국을 너무도 갈망했기에 어느 조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정병준 교수는 현앨리스를 일본 제국의 신민, 미국의 시민, 남한의 국민, 북한의 공민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이질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평가하며, 그의 삶에 투영된 한국 근현대사를 이렇게 정리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경로는 그녀의 한 몸에 다중적이고 역설적인 정체성을 강요했다. 현앨리스를 투과한 근현대의 빛은 공존 불가능한 극단적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한동안 그 문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너무 쉽게 거대한 단어를 사용한다.

독립, 해방, 혁명, 이념, 분단, 전쟁, 국가, 민족.

그러나 그 거대한 단어들이 현실을 압도하는 순간 그 밑에는 언제나 구체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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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고향을 떠났고, 누군가는 가족과 헤어졌으며, 누군가는 자신이 믿었던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름을 잃었고, 어떤 사람은 묘비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 수많은 삶이 깔리고 바스러진 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읽고 내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념에 관한 판단이 아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갈린 연약한 개인의 비애였다.

그리고 그 비애를 따라가다 보니 결국 다시 한번 앞서 제기한 질문 앞에 서게 됐다.

조국(祖國)이란 무엇인가.

독립운동가인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조국의 해방을 꿈꾸었지만 남과 북, 미국 어느 곳에도 끝내 온전히 속하지 못했던 현앨리스. 그녀의 삶을 한 세기가 지난 오늘 다시 읽는 이유는 그녀가 어느 편에 있었는지를 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와 국가와 이념이 인간에게 어떤 이름을 붙이기 전에, 그 안에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병준 교수는 책의 마지막에서 “묘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그 삶이 전하는 역사적 울림”에 미래의 한국이 좀 더 진지하고 관대한 성찰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랫동안 명치 끝이 저렸다.

은퇴를 앞둔 지금, 다시, 조국(祖國)이라는 말을 오래 되새김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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