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자 슬픈 사연을 가슴에 두고 살아간다. 주변에는 가난으로 인해 슬픈 일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배우지도 못하고, 병을 치료받지도 못하며, 일거리를 찾아 타향살이를 하는 자들의 슬픔이 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가슴이 시리도록 슬픈 일이다. 혹자는 “이별이 슬픈 이유는 한 사람은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아는데 다른 한 사람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이별이 슬픈 것은 헤어짐의 그 순간이 아닌 그 뒤에 찾아올 혼자만의 그 외로움의 시간 때문일 것이다. 이별과 관련해서 최고로 슬픈 사연은 사별(死別)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어린 자녀들을 불의의 사고나 몹쓸 질병으로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슬픔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나간다.
한 개인과 가정의 슬픔도 그렇거니와 민족적으로 당하는 슬픔이 있다. 그것은 주로 전쟁으로 인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어떻게 필설로 다 그려낼 수 있겠는가? 우리 민족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했다. 그 후유증으로, 남북이 두 동강이 난 채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록 식구들의 생사조차 확인하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이산가족들의 그 슬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얼마 전에도 있었지만, 1980년대 초에 한동안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일이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만나는 그들의 얼굴에는 폭포수와 같은 애절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눈물이 솟구쳤다. 우리 민족의 이 한 맺힌 슬픔은 지금도 눈물이 되어 온 강토에 흘러내리고 있다. 도대체 이 슬픔의 눈물은 언제나 멈추어질까?
‘하시디즘’(Hasidism)이라고 일컫는 유대교 신비주의에 속하는 책에 이런 우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국의 문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앞으로 가게 된다. ‘슬픔의 나무’라고 불리는 그 나무에는 사람들이 삶에서 겪은 온갖 슬픈 이야기들이 가지마다 매달려 있다. 이제 막 그 곳에 도착한 영혼은 자신의 슬픈 사연을 종이에 적어 가지에 걸어 놓은 뒤, 천사의 손을 잡고 나무를 한 바퀴 돌며 그 곳에 적혀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마지막에 이르러 천사는 그 영혼에게 그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을 선택해 다음 생을 살고 싶은가를 묻는다. 자신이 보기에 가장 덜 슬퍼 보이는 삶을 선택하면 다음 생에 그렇게 살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혼이든 결국에는 자신이 살았던 삶을 다시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슬픔의 나무’에 적혀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그래도 자신이 살았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덜 슬프고, 덜 고통스러웠음을 깨닫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토록 저마다 슬픈 사연을 두고 사는 것이 삶의 진실이라면 차라리 슬픔을 당할 때 실컷 울자. 천국에는 더 이상 슬픔이 없을 테니까.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계시록 21:3-4,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