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죽음 위에 흘리는 애통의 눈물

정희수 감독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예레미야 31:15)

조지 플로이드, 아흐모드 아베리.

두 이름, 두 생명, 두 죽음, 두 번의 비극.

우리는 그들이 더는 우리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우리는 그들의 죽음이 부정의에 기인하며, “의도”와 “의혹”과는 무관하게, 정당성이 결여된 폭력으로부터 오는 것에 더 많은 경우 분노를 느낀다.

다만 우리는 소수 인종에 대한 권력자들의 폭력 앞에 서기도 전에 너무 빨리 그들을 용서할 구실을 찾는다. 흔히 선의를 가졌다는 백인들은 나에게 이런 사건들에 인종차별을 갖다 붙이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인종차별을 단지 한 개인이 다른 그룹이나 인종에 대해 갖는 태도나 세계관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종차별은 가장 기본적인 인종차별이지만 그것은 더 깊은 문제의 현상에 불과하다.  

한 백인 여성이 센트럴 파크에서 반려견을 목줄로 매지 않은 채 산책을 시키고 있을 때, 한 아프리카계 미국 남성이 자신은 새를 보러 왔기 때문에 반려견에 줄을 채워줄 것을 권유했다. 그녀는 그 권유를 거절하고, 자기 휴대폰을 꺼내 그 남성이 흑인임을 강조하며 경찰에 신고했다.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겠는가?

우리는 다름을 다른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의심과 두려움, 판단과 편견의 원인으로 삼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제도적인 억압, 인종편견에서 비롯된 폭력, 외국인 혐오의 부추김 및 소수인종들을 색안경 끼고 보도하는 언론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의심하고 정죄하는 인간의 속성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경전인 구약과 신약은 지파주의, 인종분리, 노예제도, 성차별, 인종차별 그리고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들이 바로 우리에게 구세주가 필요한 이유다.

바울은 예수님을 노예와 자유주의, 남성과 여성,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없애고, 우리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그리스도라 이해했다.

바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재확인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인종과 민족을 염두에 두고 찾아야 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근본 진리는 우리의 차이점을 능가한다는 공통점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이들을 대한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과 병든 이들 그리고 사회 주변부에 있는 이들을 사랑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방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 우리와 다른 이들을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우리 감정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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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견들은 예수님이나 바울이 말한 것보다 수동적이다.

사랑은 행동이다. 그저 감정이 아니다.

긍휼한 마음은 단지 무기력한 생각이 아니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활력을 준다.

우리는 평화를 좋아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평화를 만드는 이들이 복되다. 우리의 형제자매가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 인종이나 민족이나 경제적인 형편이나 사는 지역이나 교육 정도나 정치적인 당파를 떠나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제자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이지 듣기만 하는 이들이 아니다. 제자들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지닌 어떠한 재능을 이용해서라도,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한다.” 이는 모두 적극적인 행동이지, 수동적인 행동이 아니다.

거의 팔 년을 위스콘신에서 지내면서 나는 젊은 흑인 청년들이 훨씬 더 많이 죽는 이 현실에 충격받고 슬퍼했다.

내 마음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로 향하지만, 또 내 마음 한편은 이런 폭력을 자행하는 이들이 경찰이든 아니든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향해서도 무거워진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런 이들이 벌어지는 지역사회들을 위해 통곡한다. 특히 나는 밀워키를 걱정한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폭력과 살인이 자행되는 이 나라에서 젊은 흑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나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나는 우리가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망가진 제도들을 가진 채, 흔히 개인만을 비난하려다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무고한 사람들은 어떤 피부색을 가지고 있든지 보호되어야 한다.

또한 죄지은 이들은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책임을 져야 한다. 정말 정의가 공평하다면 사람들은 안전하다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아무도 죽지 않게 하소서지나친 힘과 폭력을 쓰지 않고도 사람들을 진정시킬 방법을 마련하게 하소서. 모든 만남은 한 하나님의 자녀와 또 다른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만남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하게 하소서. 그리고 최소한 우리가 다른 이들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하소서. 젊은 흑인 남자들을 죽이는 일을 중단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들이 친절하고, 정의롭게,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은혜와 평화,

정희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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