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포인트
• 프랜시스 애즈배리의 미국 선교 250주년을 영국감리교회와 연합감리교회가 함께 기념했다.
• 9월 11-12일 양일간 영국 브리스톨에서 열렸던 특별 행사는 10월 30-31일 필라델피아에서 마무리된다.
• 영국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애즈베리는 감리교 운동을 이끌기 위해 신대륙에 파송되었고, 두 명의 연합감리교회 초대 감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신대륙으로 간다. 무엇을 해야 하나? 명예를 얻으려 하는가? 내가 아는 한 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은 없다. 돈을 벌려고 하는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이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할 것이다.” — 1771년 9월 12일, 프랜시스 애즈베리의 일기.
1771년 9월 4일,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른 젊은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영혼을 구하고, 이제 막 시작된 당시 식민지 신대륙에서의 감리교 운동을 돕고자 하는 사명으로 가득 찼다.
배에 승선하기 몇 주 전에 있었던 모임에서, 26살의 이 설교자는 미국으로 건너가 설교할 사람을 찾는다는 감리교의 공동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요청에 자원하여 나섰다. 비록 애즈베리가 신대륙으로 간 첫 번째 감리교 설교자는 아니지만, 그는 미국에서의 감리교회, 즉 오늘날의 연합감리교회로 이어지는 조직의 대부분을 만들고, 다른 나라에서도 감리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기본 틀을 마련해준 사람이다.
대서양 양쪽의 감리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브리스톨에 있는 존 웨슬리의 뉴룸에서 9월 11일 화상 음악회와 9월 12일 예배를 통해, 애즈베리의 대서양 횡단 250주년을 기념했다. “대서양을 건너라는 사명에 애즈베리가 응답한 것”을 기념하는 이 행사는 교회와 개인이 소장한 자료 전시와 더불어 계속될 예정이며, 10월 30-31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특별행사로 그 대장정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브리스톨에 있는 감리교회와 연합감리교회의 역사보존위원회도 이 행사를 위해 협력하고 있다.
역사보존위원회의 위원장인 애슐리 보간 드레프는 이메일에서, “프랜시스 애즈베리의 대서양 횡단 여정은 대서양 양쪽 감리교회의 연결을 상징한다.”라고 말했다. “애즈베리는 소명을 가지고 식민지로 건너와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을 지속하고 성장시켰다. 하지만 그와 웨슬리는 독립운동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상황을 생각할 때, 감리교가 얼마나 성장하고 발전할지 알 수 없었다. 이 행사는 우리가 공통된 뿌리를 가졌고, 우리가 서로 분리되어야만 했던 과정이 있었음을 생각나게 했다.
감리교회의 부의장인 바라라 이스톤은 9월 12일 예배 중, 자신을 “애즈베리의 팬”이라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애즈베리는 그가 찾아간 미국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는데, 자신이 자라난 영국감리교인 사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이스톤은 말했다.
그녀는 산업 도시인 웨스트 미들랜드의 가난한 마을에서 자라던 애즈베리의 유년 시절을 자세히 설명했다. 또한 어머니를 따라 감리교인이 된 그가 학교에서 “열성적인 신앙” 때문에 놀림을 받았던 일과 학교를 졸업한 후 대장장이의 조수가 되었을 때도 “신앙이 그의 삶을 지배했다.”라고 이스톤은 말했다.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못을 만드는 수습공인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지만, 그는 열성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그에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열정을 주었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또한 “그는 배움이 깊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사람들이 장거리 여행을 다니지 않던 시절에도, 그는 여러 마을을 부흥시키고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엄청난 거리를 돌아다니며 설교했고, 자신이 발견한 것과 믿음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라고 사람들을 격려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특출난 설교자로 알려져 있다.”라고 이스톤은 말했다. “그는 자신감도 별로 없었고, 별로 건강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을 제한하도록 그냥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단지 그는 자신의 손을 높이 들고,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스톤은 그녀가 사는 지역을 애즈베리가 어떻게 섬겼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영국을 떠난 후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해 많은 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내가 아는 한 그는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에 반대할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능력이 나의 약함을 덮어주신다.’라고 말했고, 그것이 바로 애즈베리가 나의 심금을 울린 이유다.”
감리교회 역사보존 위원인 사라 홀딩데일은 애즈베리의 대서양 횡단 25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미국인들뿐 아니라 영국 감리교인들에게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비록 대부분의 영국 감리교인들은 애즈베리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의 영국에서의 경험은 그를 신대륙으로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준비시켰다. “그가 이곳 영국에서 보낸 시간은 그가 미국에서의 시간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설교하는 순회설교자로 파송 받는 일은 다른 설교자들이 원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언어와 신체적인 공격을 경험했던 애즈베리는 그가 미국으로 갔을 때 이미 그런 적대감을 다루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홀링데일은 애즈베리의 이야기가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소명에 초점을 맞추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소명은 무엇이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부르시는가?”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명을 성찰할 수 있도록 애즈베리가 감동을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 안 하고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그의 관심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기를 바랐을 뿐이다.”
뉴룸재단의 위원이자 브리스톨과 남부 글로세스터셔 순회 지역의 감리사 노베트 헤들리 목사는 애즈베리의 대서양 횡단이 “감리교회에 있어서, 정말 획기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웨슬리는 세계가 자신의 교구라고 했지만, 혼자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경험과 영향력을 통해 … 그는… 미국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프랜시스 애즈베리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할 수 있게 성령이 사람들은 붙여준다고 말했다.
더 알고 싶다면,
“애즈베리의 대서양 횡단: 부르심에 응답”에 관한 정보와 자료들은 연합감리교회 역사보존위원회와 영국감리교회에서 얻을 수 있다.
1739년에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 건물인 뉴룸은 기념 예배를 드리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장소다. 이스톤은 “웨슬리의 존재감을 이곳에서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웨슬리가 설교자들이 설교할 때 시간을 준수하라고 보내준 그 시계 밑 그리고 나무 바닥과 소박한 장의자가 있는 바로 이 장소에서 애즈베리는 웨슬리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미국 행을 자원했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애즈베리는 근처 항구 마을인 필에서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섰다. 전기 작가인 L. C. 루돌프에 의하면, 그는 침구 하나 없이 담요 2장만 가지고 53일간 배에서 잠들어야 했다.
그는 몇 년간 부모님과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어머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1797년 편지에 미국을 떠나는 것은 “내 가슴을 찢어놓는 일”이라고 쓰고,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애즈베리는 선교와 복음전파에만 집중했다.”라고 홀링데일은 말했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형제에게는 가정과 친구들이 있었지만, 애즈베리는 결코 한눈을 팔지 않았다. “애즈베리는 24시간 내내 사역을 했지만, 오늘날의 사역자들에게도 그렇게 권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끊임없이 이동하며, 그의 순회지역을 미국 전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매일 설교를 하며, 설교자들을 끊임없이 감독하고 격려했으며, 교회도 조직했다. 그는 험한 준령을 넘고, 도로가 없는 지역을 통과하며, 말을 타고 30만 마일 이상을 여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집이 없었고, 다른 가족들과 함께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작가 루돌프가 쓴 글을 보면, 애즈베리가 너무 유명해서 그의 동료 감독인 토마스 코크가 “북미의 감독 애즈베리 귀하”라고 편지를 쓰면, 그것이 그에게 배달될 정도였다고 한다. 코크와 애즈베리는 미감리교회의 강력한 성장과 함께 미국독립전쟁 직후 생겨난 미감리교회 초대 감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애즈베리는 전국에 복음을 전했으며 많은 설교자가 도시에 머물기를 선호할 때도 시골 지역을 돌아다니며 배경이 다른 모든 사람과 교제했다고 홀링데일은 말했다. 그는 흑인 설교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안수를 주었다. “당시 그에 대한 전례가 전혀 없었지만, 애즈베리는 관습보다 소명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을 한다고 믿었다.”
홀링데일은 애즈베리가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설교했다고 말했다.
“그가 미국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에는 도움을 요청했던 감리교인 수백 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임종 시에는 수십만의 감리교인이 있었고, 바로 그것이 애즈베리가 끼친 영향이었다.”라고 홀링데일은 말했다.
애즈베리의 횡단을 기념하는 일에는 다양한 행사들이 포함되었다.
전시된 자료 중에는 일기장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 일기 쓰기는 애즈베리가 목회하는 내내 지켜온 습관이었다. 교회는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기념행사를 통해 얻어 가길 원했고, 이에 두 명의 선교사들이 일기에 관한 한 편의 논문과 비디오를 제작했다고 홀링데일은 말했다. 애즈베리는 주로 자신의 믿음을 묵상하며 일기를 썼고, 상황이 좋든 나쁘든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되돌아봤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또한 9월 11일 온라인 생중계 음악회는 “애즈베리가 미국에 공헌한 문화적인 영향”을 반영하기 위해 마련되었다고 할링데일은 말했다.
맥파이22라고 하는 브리스톨에 기반을 둔 미국 밴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피처링해 애즈베리에게 알맞은 “이름도 없는 한 마리의 말”이라는 주제곡을 포함한 자작곡들을 한 시간 동안 공연했다.
맥파이 22밴드의 작곡가 겸 가수인 돈 켈리는 자신이 애즈베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뉴룸에서 자신들에게 공연을 부탁한 후, 그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는 그가 숨겨진 영국의 영웅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라고 켈리는 말했다.
그녀는 음악회 중간에, 이제 영국인들이 애즈베리와 그의 기념비적인 업적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겸손한 애즈베리가 이 기념행사를 좋아할까?
“나는 에즈베리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그의 믿음과 자신에게 그런 일들을 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원했을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홀링데일은 예배 중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애즈베리를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인물로만 보는 것에 경계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자신이 살았던 1771년이든 지금 2021년이든, 그는 오늘도 여전히 담대하게 자신의 믿음을 살아냈을 것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 생각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애즈베리는 하나님께 맞추어 살기를 원했고,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든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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탠튼은 연합감리교뉴스의 편집장이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tkim@umnews.org로 이메일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더 읽기 원하시면,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