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전설적인 인물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와 한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주겠다."
타조 잡는 법은 이렇단다. 말을 타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따라가면 타조가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모래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다. 그러면 가서 묶어 오면 된다. 본능적인 반응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상황의 노예가 된다. 왜? 라고 물으면서 익숙한 것에서 늘 새로운 차원을 읽어내는 사람, 왜 1더하기 1은 3이 아니고 둘이 되는지를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1999년 5월 31일 타임지에 이런 기사가 나왔다. "It's true. Asians can't think!" 홍콩 사람이 쓴 기사다. 중국이 원자탄을 만들었지만, 그 기술은 서구에서 빌렸다. 소니와 파나소닉의 일본이 기막힌 전자제품을 만들어 내지만, 이 기술은 뉴톤의 물리학과 양자역학을 빌려 온 것이다. 아무리 공산주의 우월성을 중국이 아직도 주장하지만 그것 역시 막스에게서 나오고 케인즈와 프리드만의 경제학에서 경제성장의 이론도 빌리고 있다. 노벨상을 탄 아시안도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안이들이다. 암기가 주를 이룬 동양의 교육은 창의성과 상상력을 억압하기 때문이란다.
자발성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하고 묻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으면 창작력와 상상력이 나올 수 없으며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과 상황파악을 요하는 통찰력은 생기지 않는다.
사냥꾼에게 쫒기는 타조처럼, 시대적인 흐름을 읽지 못하고, 본능적인 두려움에 쫒기어 도망가다 결국엔 어떤 조직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닮았다. 책임이라는 영어 단어를 살펴보라. Response(반응)+ability (능력) 즉 상황에 대한 반응능력이 책임이다.
수련원 뒤 뜰에 있는 소나무를 붙잡고 한나절을 보낸 교인이 시를 썼다. 그 때 교인이 붙잡은 소나무는 늘 보던 소나무가 아니었다. 소나무를 붙들고 소나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 것이다. 그 소나무가 되어 소나무를 붙들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닫혔던 창조와 상상이 열리기 시작하니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자아가 소나무가 되어 자신을 바라볼수 있는 힘이 생기니 존재가 자신을 열어 말을 걸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적이다. 존재의 열림이다. 계시다. 자유다. 창조의 세계가 열린것이다.
익숙한 것은 죄악이다. 자기를 죽이는 일이다.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 신앙의 본질이다. 본토 친적 아비집을 떠나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다. 갈바를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탐험하며 새로운 세계와 만나면서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틀을 깨는 것이다.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신앙이 정형화된 틀로 사람을 가둔다면 그것은 타락의 시작이다.
애플이 왜 힘을 가졌으며, 구글이 웹세계를 지배하는 이유도 단 하나다. 틀을 주지 않고 개인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작력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살아 움직이는 자율적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리더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다. 전체를 읽고 흐름을 잡아내 흐름을 주도해 낼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좋다 나쁘다 판단의 세계를 넘어서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넘어서서)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자신이 이끌고 있는 조직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조짐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야 위기에서 건져낼 수 있고, 암담한 상황에서 조직을 끌어 낼 수 있다. 전체와 흐름이 안보이면 함께 우왕좌왕하면서 영문도 모른채 자신도 빨려들어가고 만다. 타조처럼 머리를 쳐박고 사냥꾼의 밥이 되고 만다.
상황을 파악하고 흐름을 감지하며 조짐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은 질문에 있다.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왜 이 상황에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물을 수 있는 사람, 자기가 알아서 일을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나는 나다. 너는 너다. 그것은 그것이다. 그렇게 분리해 낼 수 있을 때 자기를 보고 너를 보고 그것을 읽어 낼 수 있다.
알프레드 디 수자는 이런 시를 썼다. "춤춰라.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자발성 (Spontaneity)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알아서 재미있게 해내는 그 어떤 것, 명사가 아니라 동사, 모방이 아니라 모방을 통해서 드디어 자기 세계가 만들어져 독창성을 갖는 것, 자유다. 진정한 사랑의 세계다. 참 신앙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다. 자발적 생명력 참 좋은 말이다.
글쓴이: 홍석환 목사, RISEM 지방감리사
올린날: 2013년 3월 4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