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울기 위한 것

‘다양한 목소리, 한 믿음(Many Voices, One Faith)’은 연합감리교회 내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신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오늘날 연합감리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를 돕기 위한 포럼이다.  ‘다양한 목소리, 한 믿음(Many Voices, One Faith)’은 연합감리교회 내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신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오늘날 연합감리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를 돕기 위한 포럼이다.

편집자 주: ‘다양한 목소리, 믿음(Many Voices, One Faith)’은 연합감리교회에 관한 주제의 신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오늘날 연합감리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를 돕기 위한 포럼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는 경험을 합니다. 어쩌면 바울은 그 이후로도 비슷한 경험을 계속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 중 낙오한 마가를 데려와 2차 선교여행에 합류시키려 하자 바울은 거세게 반대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죽음이 임박했을 때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가 자기에게 유익하니 그를 데려오라고 부탁합니다. 자신이 한때 실격자로 낙인찍었던 바로 그 마가를 말입니다. 

연합감리교회 목사로서, 우리 교단의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저는 이성애자로서 동성애를 옹호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동성애에 관한 핵심 본문인 로마서 1:26-27에 대한 제 이해를 나누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주석자료를 주관적으로 전개한 것이기에 어설프고 틀릴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랫글은 제가 동성애를 주제로 썼던 영문 에세이를 한글로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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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6-27은 비록 동성애라는 단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남성 간 동성애와 여성 간 동성애 모두를 신학적인 관점에서 비판한다.

첫째로, 1:26-27이 속한 더 넓은 문맥(1:26-27 < 1:23-32 < 1:18-32 < 1:18-3:20 < 1:18-11:36)을 살펴보자.

로마서의 전반부인 1:18-11:36의 두 가지 주된 주제는 ‘불의한 자를 의인화(3:21-8:39)’한 것과 ‘하나님의 신실성(9:1-11:36)’이다.

1:18-3:20은 예비진술로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의 구원 은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핵심 구절은 3:9-10로, 유대인과 희랍인 모두 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이다.

1:18-32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다. 그들의 우상숭배와 성적인 부도덕성은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상숭배의 결과는 동성애의 실천(1:26-27)과 악덕 리스트(1:29-31, 악덕 리스트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하는 , 비방하는 ,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 능욕하는 , 교만한 , 자랑하는 , 악을 도모하는 , 부모를 거역하는 , 우매한 , 배약하는 , 무정한 , 무자비한 말한다. 편집자 ) 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여기에서 우상숭배의 결과들 가운데 하나의 심각한 사례로서 동성애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동성애를 하나의 독립적인 주요 주제로 다루지는 않는다(cf. Victor P. Furnish; Arland J. Hultgren; Peter Von Der Osten-Sacken).

1:23-32의 문학적 구조에서 두드러지는 두 개의 동사는 (인간이) ‘교환하다(알랏소: 23; 메탈랏소: 25, 26)’와 (하나님께서) ‘넘겨주다(파라디도미: 24, 26, 28)’이다(cf. Arland Hultgren).

인간은 ‘썩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이미지의 형상’과 교환했고(23),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더러움’에 넘겨주셨다(24).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과 교환했고(25)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수치스러운 정념(파토스)’에 넘겨주셨다(26a).

여성들은 ‘자연적인(휘시켄) 이용(크레시스)’을 ‘자연에 거스르는(파라 휘신) 이용’과 교환했다(26b). 남성들도 (여성들을 대상으로 해야 할) ‘자연적인 이용’을 버렸다(27).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천박한 마음’에 넘겨주셨다(28).

범위를 좁혀 26b-27을 다시 보면, 여성들은 ‘자연스러운 이용’을 ‘부자연스러운 이용’과 교환했고(26b), 남성들도 ‘자연스러운 이용’을 버리고 남자끼리 서로를 향한 ‘갈망(오렉시스)’속에서 ‘불타올랐다(엑카이오)’.

여기서 ‘이용’이라는 용어는 구체적인 성적 행위를 언급한다(cf. James Miller). ‘교환한다’는 용어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적인 도착 혹은 악용(perversion)(23, 25)’과 ‘성적인 도착(26b-27)’을 지적한 것으로, ‘자유로운 선택’이나 ‘책임지는 행동’의 문제를 의미한다(cf. Furnish; Hultgren; Margaret Davies).

따라서 바울은 동성애적 실천을 다루는 것이지, ‘자유 선택’과 무관한 동성애 지향성(orientation)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갈망(27)’이라는 희랍적 용어는 여기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불타오르다(27)’라는 희랍적 용어 역시 비정상적이고 착취적인 탐욕을 암시한다(cf. Hultgren). ‘자연 또는 본성(휘시스)’이라는 개념도 희랍적이며 ‘자연 또는 본성을 거스르는(파라 휘신)’과 ‘자연 또는 본성적인(휘시켄)’ 같은 용어들도 희랍 문헌에서 온다(cf. Davies). 이 용어들은 남성과 여성을 뚜렷이 구분하는 일과 관계가 있는데, 여기서 ‘아르센’과 ‘텔뤼스 같은 용어들은 성적이고 생식적인 의미에서의 ‘남성과 여성’을 의미한다(cf. Roy B. Ward). 

이러한 용어 분석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바, 바울은 동성애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뚜렷한 구분을 통하여 출산을 강조하는 창조된 질서와 본성을 침해한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에게 동성애는 자연 혹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둘째로, 1:26-27의 문화적 배경을 살펴보자.

바울 당시의 세계에는 몇 가지 동성애 유형들이 있었다.

성인 사이의 동성애, 소년과의 동성애, 남창이나 여창과의 동성애, 주인과 노예 사이의 동성애 등이다.

1:26-27에서 바울이 어느 유형의 동성애를 거부한 것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힘의 불균형에 기초한 당시의 남성 중심적 신분 계층적인 문화에서, 바울은 당시 동성애의 비인간적이고 착취적인 측면을 보았기에 동성애를 인간 탐욕의 한 사례로 여겼고, 그것을 우상숭배로 인해 초래된 결과들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셋째로, 바울의 논리와 그 배경을 살펴보자.                           

바울은 1:18-32에서 우상 숭배적인 도착을 성적 도착에 관계시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거짓과 교환했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다(25). 바로 그런 까닭에 성적인 도착이 발생하는 것이다(26-27).

바울은 우상 숭배적인 성적 도착을 진술하면서는 유대 사상의 영향을 받고, (동성애적) 성적 도착을 진술하면서는 희랍 사상과 희랍적 유대 사상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cf. Davies; Ward). 그 예로서 본성(자연)에 대한 사상, 반-쾌락주의, 친-출산주의, 남성과 여성 사이의 뚜렷한 구분 등을 들 수 있다(Davies; Ward).

바울의 ‘본성’ 개념은 희랍 사상과 희랍적 유대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cf. DeYoung; Ward).

‘본성을 거슬러’와 ‘자연/본성적인’이란 용어는 플라톤(Plato)에게서 온 것이다(cf. Ward; Hays). 희랍적 유대 사상은 희랍의 자연 개념을 유대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해(창조주이시며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와 결합했다. 따라서 희랍의 ‘자연의 질서’와 ‘자연법’은 유대적인 ‘창조의 질서’와 관계를 맺게 된다(cf. DeYoung).

구약(유대)성서는 친-출산(인구 증가)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창 1:27-28).

희랍 사상 또한 그러하다. 플라톤에게 출산을 위한 성관계에서 비롯된 쾌락은 ‘본성에 따른’ 것이고, 그렇지 않은 쾌락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다. 여성의 성은 오직 출산을 위해서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cf. Ward; Osten-Sacken).

희랍적 유대 사상 또한 이 전통을 갖는다. 희랍적 유대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도 쾌락(헤도네)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즉, 불임 여자들이나 생리 중인 아내와 성관계를 갖는 등 출산을 위한 것이 아닌, 성적 쾌락 때문에 이루어지는 남녀 간의 모든 관계도 정당한 것이 아니다. 필로는 남성 간의 동성애도 정죄하는데 이는 불임 여성들처럼 출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cf. Furnish; Davies; Ward).

넷째로, 이러한 바울의 동성애 이해는 우리의 상황에 얼마큼 적용 가능한가?

1:26-27에서 바울은 암시적으로 자연의 질서와 창조의 질서로서의 친-출산의 입장을 갖는 듯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런 입장을 철저히 적용하지는 않는다(cf. Furnish; Dale B. Martin).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독신 생활을 하나의 가능한 기독교적 삶의 방식으로 제시하는데, 그것은 때로 은사의 선물로 주어진다. 따라서, 금욕 생활이 결혼한 부부들에게 허용되기도 한다.

바울은 이혼과 재혼을, 출산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그저 반대할 뿐이다.

바울은 출산을 위한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만약, 출산을 강조한다면 ‘본성’에 따라 당연히 남성과 여성 사이를 뚜렷하게 나누어야 하는데, 여기서 바울은 그저 머리 스타일이나 옷차림같이 부차적인 것을 구별할 뿐이다(고전 11장).

쾌락을 반대하고 출산을 옹호하는 바울의 입장은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이방인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희랍적 유대 사상의 입장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그러한 입장을 우리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친-출산의 입장 그 자체가 성서에서 유일한 가치 표준으로 옹호되지도 않는다.

최초의 인간들의 불명성을 강조하는 야훼문서인 창세기 2:24은 친-출산의 입장을 강조하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성적 욕구를 제시할 뿐이다(cf. Ward; Claus Westermann). 또한, 아가서는 출산 없는 사랑을 다룬다.

고린도전서 7장은 결혼의 이유로서 출산을 강조하는 대신에, 인간의 성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에도 초점을 둔다.

만일 친-출산의 전통을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절대화한다면, 결코 출산의 목적으로만 축소될 수 없는 여자의 전인격성이 침해당할 것이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를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여성 혐오(misogyny)의 위험성을 수반한다.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cf. Rosemary Ruether). 우리는 모두를 같은 사람으로 보는 일이 중요한데(cf. Davies), 그것은 여자를 ‘열등한 남자’로 여기는 희랍적인 ‘one sex’ 모델의 관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성적인 지향성을 언급하지 않았다. 동성애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자유 선택으로서의 행동에 초점 한다. 행동에 초점을 두는 바울의 입장을 우리의 상황에 절대화한다면 우리는 인간관계의 전체 맥락을 잃고 동성애자들을 비인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인간은 그들의 성적인 행동에 의해 제한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성적인 지향성을 가진 전인격적인 존재로 이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산을 축복으로 여기고, 농경사회의 생산성을 담보할 인구 증가가 중요하던 고대사회에서는 이성애가 표준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오늘 우리의 상황은 그와는 다르다.

이성애가 동성애보다 문제를 적게 야기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성애만이 전통적인 관계성이나 책임성을 담보하고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성적 다수로서의 이성애가 갖는 도덕적인 자기기만의 위험성 역시 직시해야 할 것이다(cf. Osten-Sacken; Gerald Sheppard).

이성애자가 갖는 동성애 혐오의 뿌리를 대면하면서 ‘여성 혐오’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물어야 한다. 넬슨(James Nelson)이 제기하는 것처럼, 소위 ‘실패한 남성으로서의 두려움’, ‘양성애적 경향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랑에 대한 혐오(erotophobia)’, ‘자신의 몸으로부터의 소외’ 등의 잠재적인 이슈 여부도 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바울의 정죄는 그의 신학적이며 윤리적인 핵심주제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이해의 빛에서 읽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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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바 바울은 동성애적 지향성이 아닌 동성애적 실천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며, 그 또한 여러 가지 요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비판을 동성애를 정죄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우리 연합감리교회 장정 (2016)은 이렇게 말합니다:

‘연합감리교회는 동성애의 실천을 용납하지 않으며 이 실천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우리는 가정들과 교회들이 레즈비언, 게이 멤버들과 친구들을 거부하거나 정죄하지 않기를 호소한다.’

동성애의 실천은 용납하지 않지만, 동성애자들 자체는 정죄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관계적 정의(relational justice)의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성적 다수인 이성애자들의 지향성과 실천은 그 권리를 하나로 인정하고 당연시하는 반면,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은 인정은 하되 그들의 실천은 정죄함으로써 그들을 반쪽짜리 존재로 살도록 억압할 수 있습니다.

둘째, 바울은 자신이 살던 당시, 동성애적 실천에서 비인간적이고 착취적인 측면을 인식했을 것이라 추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애자는 미성년자, 남창, 여창 혹은 노예와의 성관계의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성인 남녀 사이의 성관계에서는 힘의 불균형, 폭력, 기만 그리고 불륜의 위험성으로부터 온전히 면제된 채, 언제나 도덕적인 ‘실천’을 담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셋째,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온정주의 혹은 식민주의의 관점에서 억압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지만, 우리와는 달리 당신들은 잘못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으시오.”하는 강요 말입니다. 이는 동성애자들에게 실천에 대한 죄책감(guilt)뿐 아니라 더 나가 존재론적 수치감(shame)까지 교묘하게 강요하는 폭력입니다.

안티고네가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 오이디푸스의 망령에 자신의 눈물을 보아달라고 절규하는 모습을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눈물이 말하는바, 눈은 원래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울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상대방을 볼 수 있는 즉,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절대화한다면, 우리는 결국 상대방을 규정· 소유· 정죄· 통제· 억압· 착취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어찌 인간의 제한된 인식능력에 갇히겠습니까. 인간의 삶은 신비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터치될 수 있을 뿐이라고 믿습니다.

성서를 상대방을 정죄하는 인증 본문(Proof-text)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예수님이 이루신 인간 해방의 단서를 찾는 본문(Clue-text)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죽음의 권세 아래 사로잡힌 인간들의 곤경을 안타까워하시며, 죽음의 세력에 분노하시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 가두고 수의로 꽁꽁 묶어 속박한 그 죽음의 세력을 굴복시키시고 말씀하십니다: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  

김선중 목사는 위스컨신연회 소속으로 사우스밀워키 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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