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미감리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떠한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그 갈등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를 3번에 걸쳐 싣는다. 오늘은 그 시리즈 중 세 번째로 연합감리교회의 출범과 현재의 갈등에 관한 글이다.
통합으로 향하는 험난한 길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남감리교회와 미(북)감리교회의 대표들은 서로의 총회를 방문하고, 여러 연합기관에서 함께 사역하며 교류하게 되었고, 두 교회가 함께 (공동)찬송가와 예배서를 발행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감리교회와 북감리교회가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은 북감리교회에 소속된 흑인 교회와 교인들이었다.
1916년 통합을 위한 대화를 시작할 때, 남감리교회에는 흑인 교인들이 없었지만, 북감리교회에는 25만 명 이상의 흑인 교인들이 있었다. 감독직의 수행, 총회의 권위, 지역총회에 대한 개념 및 흑인 목회자와 흑인 회중들의 교회 내 역할에 관한 의견 차이로, 1924년 예정된 통합을 위한 준비모임은 결렬되고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때 감리교개신교회가 통합의 논의에 가담하며 교회는 통합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새로운 교단의 커다란 논쟁거리는 지역총회 분할에 관한 건이었는데, 마침내 행정구역을 6개로 나누되 5개는 지역별로, 1개는 흑인 회중들만의 조직으로 결정하였다.
1936년 개최된 감리교개신교회 총회에서 통합 계획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나, 같은 해 개최된 미(북)감리교회의 총회에서는 인종차별 문제를 놓고 장시간 논쟁이 벌어졌다.
중앙지역총회의 모습. 사진, 연합감리교회 교회역사보존위원회 제공.
교단 통합 계획의 제안자들은 흑인 교회들로 구성된 중앙지역총회(Central Jurisdiction)가 인종차별의 문제가 아닌 행정과 정책적인 면을 고려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앙지역총회가 소수 그룹인 흑인들의 권익을 위한 것으로, 흑인들이 자신들의 감독을 선출하고, 통합된 교회에서 동등한 대표성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흑인 대의원들은 그 안건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인 대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합에 관한 안건은 미(북)감리교회 총회를 통과했다.
그 후, 남감리교회가 1938년 총회에서 통합 계획안을 통과함으로 교회는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연합감리교회의 탄생과 새로운 갈등의 불씨
1968년 4월 23일 달라스에서 연합형제교회(United Brethren Church)의 류벤 뮬러(Reuben Mueller) 감독과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의 로이드 위크(Lloyd Wicke) 감독이 서로의 손을 잡고 두 교회가 통합하여,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가 출범하였음을 선포했다.
연합감리교회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개신교회가 되었으며, 미전역에 분포하는 대표적인 교회가 되었다.
1968년 총회에서는 1970년에 5일간의 특별총회를 개최하여 두 교단의 통합에 따른 교회의 기관과 구조에 대해 논의하기로 하였으며,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연합감리교회의 구조, 사회문제에 관한 원칙들, 그리고 신학과 교리에 관한 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그중 하나가 흑인들로 구성된 중앙지역총회였다.
두 교단의 통합 논의의 과정에서 어떠한 차별적인 기구를 갖지 않았던 연합형제교회가 통합의 조건으로 차별적인 중앙지역총회의 폐지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중앙지역총회의 공식적인 폐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흑인교회들의 연회가 존재하였다. 이에 인종관계위원회(Commission on Religion and Race)를 조직하여 1972년 총회 전까지 남아있던 흑인 교회 중심의 연회가 다른 연회와 기관에 잘 융합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인종차별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던 중앙지역총회(Central Jurisdiction)는 연합감리교회의 출범한 1968년부터 다음 총회가 열린 1972년 사이에 미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971년 진 레겟(Gene Leggett)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후, 남텍사스연회는 그의 목사 자격을 박탈했다.
그 후 열린 1972년 조지아의 애틀란타 총회에서 사회생활원칙 연구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인 제임스 토마스(James Thomas) 감독은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거룩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로 받아들이며, 그들을 교회 일원으로 환영한다. 더 나아가 사회는 그들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라는 특별위원회의 결정을 발표했다.
남텍사스연회의 레겟 목사는 총회에 발의된 사회생활원칙의 문건을 더 발전시킨 다음의 안건 통과를 호소했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성스러운 인격체이며, 인간의 존엄을 위해 분투하는 그들에 대한 교회의 돌봄과 안내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든 사람의 인권과 권익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안건은 남텍사스연회의 평신도 대표이며 변호사인 단 핸드(Don Hand)에 의해, ’비록 동성애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고, 성서의 가르침에도 위배되는 것이지만’이라는 문장으로 첨가되며 통과되었다.
(편집자 주: 1972년 총회가 연합감리교회의 사회생활원칙을 채택하면서, 동성애에 관한 최초의 공개 토론이 시작되었고, 교단의 지침서인 장정에 “우리는 동성애를 용납하지 않으며, 그것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어긋난다.”는 말과 “동성애자들은 거룩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다.”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47년 해묵은 논쟁 끝낼 작별? 에서 인용.)
이후 동성애 문제는 총회 때마다 등장하는 논쟁의 단골 주제이 되었으며,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나가는 말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고 했다. 초기 미감리교회는 ‘영국국교회’와 ‘웨슬리의 감리교’라는 알을 깨고 태어났다.
그 후로도 미감리교회는 자신의 알을 깨는 갈등과 분열의 과정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계속해서 새롭게 출발했다.
지금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숙성되어온 ‘연합감리교회’라는 알을 대면하고 있다.
한인연합감리교회가 지난 50년 동안 몸담고 있던 알을 깨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지, 아니면 우리 안에 숙성되어온 ‘편견’이라는 알을 깨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할지의 성찰이 필요한 때다.
마지막으로 감리교인들에게 한 웨슬리의 권면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감리교인들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감리교인들이 능력이 없는 종교의 모습을 한 죽은 집단으로 남게 되는 것은 두렵습니다.”(Thought Upon Methodism, 1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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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선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1988년)와 동 대학원(1991년)을 졸업하고 도미하여 드루신학교에서 교회사로 박사 학위(2008년)를 받았다. 한국 기독교감리회에서 안수를 받았고, 지금은 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연회 소속으로 시카고 근교에 있는 다우너스그로브의 훼이스연합감리교회의 담임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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