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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과 죽어감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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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죽음

(1) 죽음이란?

김영일 교수, 사진 제공, 김영일 교수.김영일 교수, 사진 제공, 김영일 교수.

지난 10여 년 사이 필자는 가까운 형제 친척 친구 10명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죽어가는 형제와 친구들을 대면하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이 사유하였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특별한 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필자는 미국에서 10여 년간 미국인 교회를 섬기면서 60명이 넘는 사람의 장례식을 집례했다. 그러나 형제자매와 친인척의 죽음을 직접 체험하는 일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새로운 감정과 시각으로 직관하게 하였다. 특별히 사랑하는 형이 전립선암으로 죽어가는 과정, 죽어서 누워 있는 모습, 그리고 얼마 후 한 줌의 재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선명하게 실감했다.

그런데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인가?

많은 사람이 죽음을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혹은 회피와 거부의 대상으로 삼은 채 그저 살아가면서 혐오의 감정을 갖거나 터부시한다. 수많은 사람이 “아직”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에 대한 관심을 버려야 한다고 했지만, 늙어가는 노년의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생각할 것이다. 노인에게 죽음은 삶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에 그렇다.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다. 죽음의 철학은 모든 사람이 결국 죽는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언제라는 “때”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죽음만큼 확실한 것도 없을 것이다. 릴케(Rilke)는 인간은 출생하면서부터 그 몸속에 죽음의 배아(胚芽)를 가지고 천천히 그것을 키워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 누구나 죽는 날이 온다. 노인이 되면 그것이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자주 든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생물학적 죽음이란 심장이 멈추어 호흡이 중지된 상태(심장사), 혹은 뇌가 활동을 멈춘 상태(뇌사), 혹은 신체의 모든 세포가 신진대사를 멈춘 상태(세포사)를 말한다.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공자는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고백했다.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을 종점으로 생각한다. 기독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 즉 영생으로의, 새 삶으로의 변이 혹은 이사라고 말한다. 윤회 사상을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한 생명체가 삶을 마치고 나면 또 다른 생명체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그러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 죽음의 순간은 어떨까? 죽음 후에는?

미국의 사회운동가인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되자 곡기를 끊고 자신이 죽을 시간을 선택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나 또 다른 깨어남이므로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스위스 출신인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ubler-Ross, 1926-2004)는 죽음은 마치 나비가 고치를 벗어 던지는 것처럼 단지 육체를 털고 벗어나는 것과 같다면서, “인간의 육체는 영원불멸의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수행한 임상 경험을 통해서 수많은 환자의 임종을 관찰한 결과를 종합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사람의 죽음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심리의학자일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1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을 통보받은 후 남은 삶을 살아가는 데 5단계의 ‘DABDA’를 거친다고 말한다.

제1단계는 ‘부정(Denial and Isolation)’인데, 환자가 의사로부터 생명의 위기 통보를 받으면 가장 먼저 “나에게는 그럴 리가 없을 거야.”라고 부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가지는 마음의 상태는 ‘분노(Anger)’의 감정인데, 이것이 제2 단계다. 그 와중에 감정 기복이 심해지기도 한다. 제3단계, 즉 ‘협상(Bargaining)’에 들어서면 점점 현실을 인지하게 되고, 마음이 약해지면서 신에게 의탁하거나 약속을 거는 등 종교심을 갖기도 하고, 혹은 더 열정적 신앙에 빠지기도 한다. 제4단계는 막다른 벽(dead end)을 느끼면서 ‘우울증(Depression)’ 단계를 거쳐, 마지막 단계인 ‘수용(Acceptance)’에 이르면 환자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남은 생을 정리하고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고 한다.

(2)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서

나의 생이 앞으로 며칠 혹은 몇 년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 <버킷리스트 (The Bucket List)>*2를 보면, 죽음을 앞둔 두 남자 에드워드와 카터가 같은 병실에서 만난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평소처럼 열심히 일하던 카터는 아내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당황한다. 암이란 통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병원 등을 경영하는 에드워드는 기침하던 중 피를 토해 검진을 받아본 결과 암으로 판정받는다. 두 사람은 시한부 생명이라는 의료 진단을 받고, 막연한 개념이었던 죽음이 현실로 눈앞에 다가옴을 직감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자 쾌락주의자로 결혼도 세 번 했으나 결국은 독신으로 살던 에드워드(잭 니컬슨)와 평생 가족을 위해서 성실히 일만 한 자동차 수리공인 카터(모건 프리먼)는 처음엔 공통점이 없어 어색하게 지낸다.

그들은 앉아서 비관하거나 슬퍼하며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꼭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절친이 되고, 그간 하지 못했던 일들을 직접 실천에 옮기기로 한다.

그 리스트에는 스카이다이빙하기, 문신하기, 아프리카 동물 왕국 탐험하기, 북극 하늘 비행하기, 장엄한 광경 보기, 눈물 날 때까지 웃기, 최고의 미인과 키스하기, 자동차 경기장에서 질주해 보기, 히말라야 등산하기 등이 있었다. 카터는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다가 쓰레기통에 버리는데, 이걸 읽은 에드워드는 “We can do it!”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we-feeling”에 취해서 자신들이 작성한 버킷리스트에 적힌 것을 하나씩 지워가면서 실행하면서 죽음을 준비한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은 곧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 행복하다” 혹은 “인생은 짧다”는 말을 한다. 여기에서 삶이나 인생에는 생명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 단어에는 3가지 표현이 있다. 즉, 바이오스(bios), 사이키(psyche), 그리고 조에(Zoe)다.

첫 번째 단어 ‘바이오스(bios)’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생물학(biology) 혹은 자서전(biography)의 어원으로 생명의 뼈와 육체를 의미한다. 그 말은 인간의 육체가 동물, 즉 개, 돼지, 닭, 곤충의 뼈와 살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바이오스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이나 어느 동물이나 별 차이점이 없다.

두 번째 단어는 ‘사이키(psyche)’인데, 이 단어는 심리학(psycholgy) 또는 정신 치료(psychotherapy) 등에서 알 수 있듯 심리 내지는 정신과 관련된 단어다. 인간에게 정신이 잘못되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다. 육체와 정신의 조화는 인간의 생명에 중요한 요소이다.

세 번째 생명이라는 단어는 ‘조에(Zo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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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이나 설교를 들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신약성서를 써 내려갈 때 느낀 점은 예수께서 언급한 생명이란 단어에는 지금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생명이란 뜻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말이 바로 조에다.

조에는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전해준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 그 자체, 즉 영혼(eternal life)이다. 조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 인간 형상의 입속으로 불어넣어 생명을 형성되게 한 그 생명이다. 조에는 일정 기간 지속되는 그런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함축된 고차원적 생명이다. 그렇다면 그런 조에라는 생명은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신약성경 요한복음은 예수를 믿으면 영생, 즉 조에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요한복음 3:16).

인간 존재란 무엇이고, 인간의 죽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죽음 하면 곧바로 생물학적 존재의 죽음을 떠올린다. 우리는 죽음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다. 생물학적 존재란 제한된 존재이고 언젠가는 육체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는 존재,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육체는 생물학적 생명으로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변하고 결국은 썩어 없어진다. 하지만 영혼이라는 생명은 형이상학적 존재로서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생명이다.

‘YOLO(욜로)’는 ‘You Only Live Once’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조어로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의미이다. 즉, 한 번 사는 인생이므로 지금의 삶을 즐기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기에 현재의 삶을 멋지게 그리고 아름답게 사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인생은 한 번뿐이고, 또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생명만 중시하게 된다. 여기에 Yolo의 남용과 오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현재만 즐기면 된다는 태도’, ‘자기 행복과 이득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등은 바람직하지 않다. 매 순간을 특별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즐기는 삶이 중요하다고 본다.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 얼마나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나는 행복한가?

1990년에 발표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에서 영어 교사인 존 키팅은 입시 등으로 긴장하며 즐거움을 잃고 있는 학생들에게 ‘Carpe diem(카르페 디엠)’이란 말로 그 순간 현재가 지닌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라고 일깨워준다. 카르페 디엠은 라틴어로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가 말한 단순히 향락을 즐기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라’, 즉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키팅은 출세를 지향하는 미국 상류사회 학생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되, 현재의 삶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여기지 말고, 지금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현재를 잡으라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라고 권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통 규율이나 범주, 세속 가치에 얽매여서 주어진 틀에 갇혀 살기를 거부해야 한다. 틀 속에서 즐거움을 잃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틀을 깨고 새로운 도전을 하며,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현재의 삶을 즐길 여유를 갖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언급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

“Twenty years from now, you will be more disappointed by the things you didn’t do than by the ones you did... So, sail away from the safe harbor. Catch the trade winds in your sails. Explore. Dream. Discover.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의 당신은 당신이 행한 것들보다 실행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서 더 실망할 것이다. 그러니 안전한 항구로부터 벗어나 항해를 떠나라. 당신의 항해에서 무역풍을 취하라. 탐험하라. 꿈을 꾸고, 탐험하라.)”

1년 후, 3년 후, 5년 후, 10년 후, 15년 후, 20년 후에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더 늦기 전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항해를 떠나야 한다. 주저하지 말고 대담하게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실현해야 한다. 버킷리스트를 어떻게 작성하면 좋을까?

(1)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나열해 본다.
(2)    그러고 나서는 우선순위를 작성한다.
(3)    우선순위 1번부터 5번까지 순위 항목의 구체적 날짜를 계획해서 적어본다.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보라. 그리고 탐험하라.

(3) 죽음의 선택

죽음이 필연이라고 동의한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도 유용하지 않을까? 물론 사고로 인한 돌연사도 있지만, 죽음을 앞세운 채 긴 세월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에는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통해 죽음의 시기를 자신이 결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명 연장 장치의 작동 중단을 스스로 혹은 법적 보호자가 결정하는 경우도 꽤 빈번하다. 그들은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연명 치료는 무익하며 경제적 손실도 감안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삶의 질이 유지되는 생명 연장 치료(Prolongation of life)는 예외이다.

199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 미국 사회에 뜨거운 이슈를 일으킨 의사 잭 케보키언(Jack Kevorkian)이 있다. 그에게는 ‘죽음의 의사(Doctor Death)’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시한부 환자가 죽기를 원하면, 그 가정을 방문해서 극약을 투입해서 죽음에 이르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150여 명이 그의 조력으로 그렇게 안락사를 택했다. 환자들이나 케보키언은 안락사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안락사(Euthanasia or Mercy killing)*3란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사회의 전통 윤리는 삶의 신성성과 가치, 존엄성 등의 이유로 안락사를 반대한다. 기독교인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소유라고 보며, 안락사는 일종의 자살 행위 아니면 살인 행위로 간주한다(출 20:13; 마 5:21, 19:18; 롬 13:9).

반면에, 상황 윤리, 직관론적 윤리,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주관할 수 있으며, 존엄하게 생명을 끊을 수 있다고 본다.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사람이 죽음을 택하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사회에도 편리(경제적 측면에서도)를 제공하는 좋은 길이라고 주장한다.

존엄사란 최선의 의학 치료를 한다 해도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에 무의미하고 인위적 생명 유지 장치를 중단하고 환자가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면서 선택하는 죽음을 말한다. 생명을 아름답게 마무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 있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소풍(2024)>에 등장하는 고향의 두 친구는 한 동기생이 갑작스럽게 질병으로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각자가 겪고 있는 질병을 심각하게 현실로 실감한다. 기나긴 삶의 여정에서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슬픔 등 온갖 풍파를 겪어온 그들은 이제 노인이 되어 쇠진해 있음을 느끼면서 편안하고 자유로운 탈출구를 찾으려 한다. 그들은 바닷가 언덕으로 손잡고 올라간다. 그들은 어떤 의학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는 우정과 용기와 동감이 있었을 뿐이다. 그 둘은 함께 영원한 소풍을 떠난다.

에이미 블룸(Amy Bloom)은 <사랑을 담아(In Love, 2023)>라는 에세이를 출판하여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최고의 논픽션 1위에 당선되었다. 그녀와 남편 브라이언은 중년에 재혼으로 만난 커플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중에, 남편이 조금씩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브라이언은 점점 깜빡하는 일이 잦아지고 인지능력도 빠르게 흐려졌다. 그는 대학생 시절에는 뛰어난 미식축구 선수였고, 건축가로 40여 년을 종사했으며, 가정에서는 다정다감하고 쾌활한 성격에 유머 감각 뛰어난 남편이었다. 얼마 후 병원에서 정밀진단을 받고 귀가하는 길에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결단은 확고했다. ‘내 삶을 존엄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소망,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떠나고 싶다’는 그의 각오. 결국 그는 67세에 부인을 설득하고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 떠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스위스에 있는 조력 자살(존엄사, 尊嚴死) 지원 단체인 디그니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떠난 후 에이미가 그 모든 과정을 담아 쓴 회고록이 바로 <사랑을 담아>다.

4. 나가면서: 늙음의 선물

인간의 삶은 누구나 끝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가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즉, 늙어감과 죽음은 필연 과정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절망인가 축복인가? 늙음이란 불행이고 절망인가 아니면 즐거움이고 행복인가? 

늙음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나의 삶은 기적이고 행복이다. 사실 70대 이후의 삶은 “Vivo La vida(인생 만세)”이다. 넥타이를 맬 날도 거의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 자유인의 여유를 즐긴다. 바비 맥퍼린의 아카펠라(a capella) 노래 “Don’t Worry, Be Happy.”가 흥얼거려지는 나날이다. 영어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Don’t worry about getting old. Worry about thinking old.” 사실 육체가 늙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제는 마음과 생각이 늙어지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의 저자 그리스의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라는 말을 남겼다. 인생을 통달한,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의 자신만만한 외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10대에는 세월이 시속 10km로, 30대에는 30km로, 50대에는 50km 등으로 내달린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빨리 가는 느낌이고, 1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 같다. 눈의 깜박거림에서 유래된 ‘순간’이란 말, 즉 ‘찰나’의 개념을 처음으로 설명한 사람은 철학자 플라톤이다. 그는 순간을 ‘운동이나 정지로 변화하는 시점’ 또는 운동과 정지 사이의 기묘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어쩌면 순간이란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시간은 상대적일 수도 있다. 지나가 버린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매 순간은 귀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주어진 그 시간은, 나에게 특별하게 찾아오는 보너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라틴어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개념도 괄목할 만하다. 그의 시간 개념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과거는 더는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지나가 버린(Already) 시간으로서 현재에 살아 있는 나에게는 추억으로만 소환할 수 있다. 한편, 미래는 아직(Not yet)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다. 단지 미래의 시간은 내가 끌어당겨서 현재에 상상으로 혹은 비전으로서 볼 수는 있다. 현재(Now)라는 시간만이 나의 현존에 존재한다. 그리고 현재의 시간은 매 순간 나와 함께 존재한다. 지금의 현재의 시간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연속적으로 찾아오는 현재라는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직면한다.

3년을 살든, 5년을 살든, 15년을 더 살든, 끊임없이 공짜로, 은혜로 찾아오는 그 현재의 시간을 우리는 보람 있게 즐겁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1. Elisabeth Kuebler-Ross, On Death And Dying: What the dying have to teach doctors, nurses, clergy and their own families,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69.

2. Oxford 사전에는 bucket list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 number of experiences or achievements that a person hopes to have or accomplish during their lifetime.” 즉, 버킷리스트란 한 사람이 평생 이루고자 하고 행하고 싶은 경험 혹은 일을 말한다. 교수형에 집행할 때, 목에 밧줄을 걸어 놓고 발밑에 놓인 양동이를 걷어찬다는 말인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Bucket list라는 말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란 뜻이다.

3. 영어의 euthanasia란 단어는 그리스어의 “eu”와 “thanato”의 두 단어로 이루어졌는데, “eu”는 “well” 혹은 “good”의 뜻을, 그리고 “thanato”는 “death”란 의미가 있음으로 안락사란 행복하고 좋은 죽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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