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예수를 훔쳐갔는가?

러스트 앤드 본”(Rust and Bone)이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길거리 싸움꾼을 직업으로, 고단하게 살아가는 알리는 어느 날, 호수에 빠져 얼음 밑에 갇힌 아들을 구하려고 필사적으로 얼음을 맨주먹으로 내리칩니다.

결국 아들은 구했으나 그의 손뼈는 다 으스러지고 맙니다.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인간의 손에는 뼈가 스물일곱 개가 있는데, 손의 뼈가 한 번 으스러지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고,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그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조심하겠지만, 언젠가 그 통증은 다시 찾아온다. 마치 바늘처럼, 깨진 유리 조각처럼.”

살다 보면, 어찌 손의 뼈만 으스러지겠습니까?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감정과 이성의 능력도, 삶의 의지와 희망도 결국 관계마저 깨어지곤 합니다.

상처가 아문다 한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처음의 순전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시간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상처가 주는 반복되는 통증에 신음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지난달, 아리조나 투산에서 열린 영성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혹독한 메마름과 무더위의 땅 한 자락에 자리한 만큼, 선인장으로 가득한 주변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지 목사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에선 비단 선인장뿐 아니라 “나물” 까지도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고 합니다.

넓은 잎사귀를 내면 곧 말라죽을 터라, 나름 살겠다고 가시를 잎으로 내며 살 수밖에 없는 그 식물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삶의 조건이 척박할수록, 혹은 남모르는 깊은 어둠과 비밀, 아픔과 상처를 지니면 지닐수록, 더욱더 살아보겠노라 몸부림치며, 더 상처받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더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로 무장하며 살고 있는지 모를 쓰라린 우리의 인생살이 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들에 사로잡혔던 여인입니다.

귀신들에 이끌리며 살다 보니, 그녀는 영과 육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찢어지고 조각나 상처로 얼룩진 채 신음하며 살았을 터입니다.

그 아픔 한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는 다시 자신의 자아를 되찾게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합류하여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들을 도우며, 예수님을 충성되게 따랐습니다. (눅8:1-3).

막달라 마리아는 매 순간 삶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는 경험을 만끽하며, 황홀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허무하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잃은 아픔과 가까스로 새로이 얻은 삶의 의미와 꿈 그리고 행복마저 잃어버리는 아픔으로, 예수님을 멀리서 지켜보며 피눈물을 삼켰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을 따르며 행복했던 그 나날들을 절망스럽게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마지막 사랑과 존경을 표하고자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를 가지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무덤은 열려있었고, 놀란 마음으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으나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녀에겐 행복했던 기억의 단서마저 사라진 셈입니다.

마리아는 “누가 내 예수를 훔쳐 갔단 말인가!” 절규하며 몇번이고 다시 무덤 안을 기웃거렸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어떠한지요?

“누가 내 예수를 훔쳐 갔단 말인가!” “누가 내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을, 꿈을, 열정을, 삶의 의미를 훔쳐 갔단 말인가!” 절규하며 그 상실의 자리를 계속 맴돌며 아파하는 일은 없는지요?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의 어느 날, 아들 녀석과 작은 개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정상적으로 성장했기에 덤덤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일이지만, 성장호르몬 결핍증이라는 장애가 있다는 진단서를 가져온 아들 녀석을 보며 터져 나오던 울음을 가까스로 삼키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 침대에 셋이 누웠습니다. 아이와 개는 곧 잠에 곯아떨어졌지만, 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못난 아빠 때문에 힘든 시절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성장 장애 진단까지 받은 어린 아들.

쉘터에서 태어나 생후 2개월 때 입양된 개.

인생의 가장 푸른 시절, 오히려 삶의 의미와 소명마저 잃고 시들어가던 남자.

우리 셋의 공통분모는 그저 행복했어야 할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 못 이루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공군 군목 후보생으로 영천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받을 때 일입니다.

훈련 마지막 코스는 군장을 멘 채로, 소총을 들고, 200킬로미터 평지와 산악지대를 행군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발바닥 이곳저곳 맺혀있어 걸을수록 점차 커지는 물집이 주는 고통이었습니다. 50분마다 10분씩 주어지는 휴식 시간을 이용해 몇 가지 방법을 취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바늘로 물집을 찔러 물을 짜내고 다시 양말을 신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곧 찌른 곳이 막히고, 다시 물집이 생기고 맙니다.

두 번째는, 물집을 떼어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생살이 양말에 쓸리는 고통은 너무 커서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세 번째는,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 양쪽을 관통시킨 후 실을 물집 양 끝으로부터 2센티미터정도 되도록 남겨두는 방법입니다. 물집 안에 생기는 물이 실의 삼투압 작용을 통해 계속 배출되어 양말에 흡수되고, 어느새 물집 속의 생살이 딱딱하게 굳어 자연스럽게 물집이 떨어져 나가게 되는 방법입니다.

임시방편으로 물집의 물을 한번 짜내주고 할 만큼 했다고 생색내는 모습이나, 겨우 그까짓 것 가지고 엄살이냐며 물집을 떼어버리는 무정한 태도 모두,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상처를 주는 폭력일 것입니다.

여러 상념으로 뒤척이며 “무거운 인생의 군장을 내려놓고 이제 그만 영원히 쉬고 싶다”고 지쳐 되뇌다, “내 아픔을 실로 삼아, 상처받은 자들에게 새살이 돋아날 때까지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돌보는 그런 목회를 나는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던 기억이 납니다.

잠 못 이루며 상념으로 뒤척였던 그 외롭고도 아팠던 밤은 이제 돌이켜 보니 새로운 소명이 싹트는 복된 밤이었던 셈입니다.

“여인아,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야!”

극적인 반전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시체마저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이전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잃었던 주님을, 잃었던 꿈과 삶의 의미 그리고 미래를 다시 찾았을 때의 감격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상처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넘어선 듯 합니다.

슬픔 속에서 빈 무덤을 “보았고(1절),”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지기인 줄 착각하여 “보았으나(14절)”, 주님의 음성을 듣고 대면한 후엔 주님을 “뵈었다”고 증언합니다(18절).

처음의 “보았다”는 단어는 “그저 본다(블레포)”는 뜻이고, 두 번째 단어는 “눈여겨본다(테오레오)”지만, 마지막 단어는 “깨닫다/파악하다(호라오)”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났을 때, 정서적인 차원을 넘어, 인식적이고 영적으로 전인격이 함께 되살아나는 회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상처를 끌어안음과 동시에 넘어서는, 바로 그 신적인 사랑의 능력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했다는 상투적인 해석은 자칫 성부 하나님을 잔인한 폭군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상처를 감싸 안고 넘어서려는, 하나님 자신의 고통받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상처와 아픔은 우리의 반복되는 현실이지만, 우리를 위한 사랑때문에 우리의 고통속에 들어오셔서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상처 너머 새롭게 열리는 삶의 지평을 찾아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함께 고통하는 사랑 말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받으시고, 성부 하나님은 죽을 수 없는 자신의 신적인 속성 때문에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보며 곁에서 함께 고통받으시며, 성령 하나님 역시 두 위격을 지탱하며 함께 고통받으셨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고통받는 사랑!

이 사랑을 요한 쉐플러 (Johann Scheffler)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상처는 이 땅에서 나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다시 ‘러스트 앤 본’ 영화로 돌아가면, 알리는 조련하던 범고래에 의해 두 다리를 잃고 의족을 한 채 살아가는 상처 입은 여인 스테파니를 만납니다.

그는 손뼈가 으스러지는 경험을 한 후 그녀의 상처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해서 울며 고백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수련원 주변 선인장에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촘촘히 난 몸통 이곳저곳에 동그랗게 파인 상처 난 구멍들이 있었습니다. 새들이 사는 보금자리였습니다.

내 상처만으로도 버겁다고, 더 독하고 날카로운 가시를 내어 자신을  무장하며 사는 것도 삶의 한 방식이겠지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함께 고통받는 사랑” 그리고 부활을 통해 확증된 그 사랑에 사로잡힌다면, 자신의 상처투성이 몸과 영혼 가운데 틈을 내어 다른 이들이 머물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함께 고통받으며 생명을 품어내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할 터입니다.

“누가 내 예수를 훔쳐 갔단 말인가!” 신음했을 마리아처럼, 오든(Wystan. H. Auden)은 장례식에 대한 그의 시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나는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내가 틀렸다.”

상처의 통증은 “바늘처럼 또는 깨진 유리 조각처럼” 우리 삶에 다시 찾아올지라도, 우리와 함께 고통받으시며 그 고통을 넘어 새로운 삶의 지평에서 살아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능력을, 이 부활절에 저는 오든의 말을 바꾸어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은 영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틀렸다.”

김선중 목사는 위스컨신연회 소속으로 사우스밀워키 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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